予自束發就傳,即喜讀子史諸集,暇則子平《淵海》、《大全》略為流覽,亦頗曉其意。然無師授,而於五行生剋之理,終若有所未得者。後復購得《三命通會》、《星學大成》諸書,悉心參究,晝夜思維,乃恍然於命之不可不信,而知命之君子當有以順受其正。 戊子歲予由副貢充補官學教習,館舍在阜城門右,得交同裏章公君安,歡若生平,相得無間,每值館課暇,即詣君安寓談《三命》,彼此辯難,闡民無餘蘊。已而三年期滿,僦居宛平沈明府署,得山陰沈孝瞻先生所著子平手錄三十九篇,不覺爽然自失,悔前次之揣摩未至。遂攜其書示君安,君安慨然嘆曰:“此談子平家真詮也!” 先生諱燡燔,成乾隆己未進士,天資穎悟,學業淵邃,其於造化精微,固神而明之,變化從心者矣。觀其論用神之成敗得失,又用神之因成得敗、因敗得成,用神之必兼看於忌神,與用神先後生克之別,並用神之透與全、有情無情、無力無力之辨,疑似毫芒,至詳且悉。是先生一生心血,生注於是,是安可以淹沒哉! 君安爰謀付剞劂,為天下談命者,立至當不易之準,而一切影響遊移管窺蠡測之智,俱可以不惑。此亦談命家之幸也;且不談命家之幸,抑亦天下士君子之幸,何則?人能知命,則營競之可以息,非分之想可以屏,凡一切富貴窮通壽夭之遭,皆聽之於天,而循循焉各安於義命,以共勉於聖賢之路,豈非士君子厚幸哉! 觀於此而君安之不沒人善,公諸同好,其功不亦多乎哉?愛樂序其緣起。 乾隆四十一年歲丙申初夏同後學胡焜倬空甫謹識
나는 머리를 묶고 스승에게 나아간 때부터 곧 자부(子部)·사부(史部)의 여러 문집 읽기를 좋아하였고, 틈이 나면 자평(子平)의 『淵海』·『大全』을 대략 훑어보아 그 뜻도 꽤 알았다. 그러나 스승의 가르침이 없어 오행 생극(生剋)의 이치에 대해서는 끝내 얻지 못한 바가 있는 듯하였다. 뒤에 다시 『三命通會』·『星學大成』 등의 책을 구하여 마음을 다해 참구하고 밤낮으로 생각하니, 이에 명(命)을 믿지 않을 수 없음을 환히 깨닫고, 명(命)을 아는 군자는 마땅히 그 바른 것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함을 알았다. 무자(戊子)년에 나는 부공(副貢)으로 관학(官學) 교습(敎習)에 충원되었는데, 관사가 부성문(阜城門) 오른편에 있어 같은 고을의 장군안(章君安) 공과 사귀게 되니 평생의 벗처럼 기뻐하고 서로 뜻이 맞아 틈이 없었다. 매번 관(館)의 과업이 한가하면 곧 군안의 거처에 가서 『三命』을 이야기하며 서로 논변하고 따져 남김없이 밝혔다. 이윽고 3년 임기가 차서 완평(宛平) 심명부(沈明府)의 관서에 세 들어 살다가, 산음(山陰) 심효첨(沈孝瞻) 선생이 지은 자평(子平) 수록(手錄) 39편을 얻고는 나도 모르게 망연자실하여 전에 헤아리고 궁리한 것이 미치지 못했음을 후회하였다. 드디어 그 책을 가지고 가서 군안에게 보이니, 군안이 감개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자평가(子平家)를 논한 진전(眞詮)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휘(諱)는 역번(燡燔)이며 건륭(乾隆) 기미(己未)년 진사(進士)가 되었다. 천부의 자질이 영민하고 학업이 깊어, 조화(造化)의 정미함에 대하여 참으로 신묘하게 밝혀 변화가 마음을 따르는 분이었다. 그가 용신(用神)의 성패(成敗)·득실을 논한 것, 또 용신(用神)이 성(成)으로 인해 패(敗)를 얻고 패(敗)로 인해 성(成)을 얻는 것, 용신(用神)은 반드시 기신(忌神)과 아울러 보아야 한다는 것, 용신(用神)과 [다른 신의] 선후 생극(生剋)의 구별, 그리고 용신(用神)의 투(透)와 전(全), 유정·무정, 유력·무력의 분별을 보면, 비슷하여 의심스러운 털끝만 한 차이까지 지극히 상세하고 빠짐없다. 이는 선생 일생의 심혈이 온전히 여기에 쏟아진 것이니, 이를 어찌 묻혀 사라지게 할 수 있겠는가! 군안이 이에 판각에 부칠 것을 도모하여 천하의 명(命)을 논하는 자들을 위해 지당하여 바뀌지 않는 기준을 세웠으니, 일체의 막연하고 오락가락하며 대롱으로 하늘을 엿보고 표주박으로 바다를 재는 식의 지혜에 모두 미혹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또한 명(命)을 논하는 이들의 다행이다. 또 명(命)을 논하는 이들의 다행일 뿐 아니라 천하 사군자(士君子)의 다행이기도 하니, 어째서인가? 사람이 명(命)을 알 수 있으면 다투어 경쟁하는 마음이 그칠 수 있고, 분수에 맞지 않는 생각을 물리칠 수 있어, 무릇 일체의 부귀·궁통·수요(壽夭)의 만남을 모두 하늘에 맡기고, 차근차근 각자 의(義)와 명(命)에 안주하여 함께 성현의 길에 힘쓸 것이니, 어찌 사군자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이를 보면 군안이 남의 선함을 묻어 두지 않고 뜻을 같이하는 이들에게 공개하였으니, 그 공이 또한 많지 않은가? 이에 기꺼이 그 연기(緣起)를 서술한다. 건륭(乾隆) 41년 병신(丙申)년 초여름, 동후학(同後學) 호혼(胡焜) 탁공보(倬空甫)가 삼가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