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人之性,定有善有惡。其善者,固自善矣;其惡者,故可教告率勉,以之為善。凡人君父審觀臣子之性,善則養育勸率,無令近惡;近惡則輔保禁防,令漸於惡,善漸於惡,惡化於善,成為性行。召公戒成曰:「今王初服厥命,於戲!若生子罔不在厥初生。」生子謂十五子,初生意於善,終以善;初生意於惡,終以惡。《詩》曰:「彼姝者子,何以與之?」傳言:譬猶練絲,染之藍則青,染之丹則赤。
사람의 성을 논하면, 확실히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 그 선한 것은 본래 스스로 선하고, 그 악한 것은 가르치고 일러 이끌고 권면하여 선하게 할 수 있다. 무릇 임금과 아비는 신하와 자식의 성을 살펴보아, 선하면 기르고 권하여 이끌어 악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악에 가까우면 도와 지키고 금하여 막아 악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한다. 선이 악에 물들고 악이 선에 교화되어 성행(性行)을 이룬다.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제 왕께서 처음 그 명을 받으셨으니, 아아! 자식을 낳는 것과 같아 처음 태어날 때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열다섯 살 아이를 말하니, 처음에 선에 뜻을 두면 끝내 선하고, 처음에 악에 뜻을 두면 끝내 악하다. 『시(詩)』에 이르기를 「저 아름다운 사람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하였다. 전(傳)에서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누인 실과 같아서 쪽으로 물들이면 푸르고 단사로 물들이면 붉다고 하였다.
十五之子其猶絲也,其有所漸化為善惡,猶藍丹之染練絲,使之為青赤也。青赤一成,真色無異。是故揚子哭岐道,墨子哭練絲也。蓋傷離本,不可復變也。人之性,善可變為惡,惡可變為善,猶此類也。逢生麻間,不扶自直;白紗入緇,不〔染〕自黑。彼蓬之性不直,紗之質不黑;麻扶緇染,使之直黑。夫人之性,猶蓬紗也,在所漸染而善惡變矣。
열다섯 살 아이는 실과 같아서, 그 점차 물들어 선악이 되는 것은 쪽과 단사가 누인 실을 물들여 푸르고 붉게 하는 것과 같다. 푸르고 붉음이 한번 이루어지면 본래 색과 다름이 없다. 이 때문에 양자(揚子)는 갈림길에서 울었고, 묵자(墨子)는 누인 실을 보고 울었다. 대개 근본을 떠나 다시 변할 수 없음을 슬퍼한 것이다. 사람의 성이 선이 변하여 악이 될 수 있고 악이 변하여 선이 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부류이다. 쑥이 삼 사이에서 자라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고, 흰 비단이 검은 물에 들어가면 물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검다. 저 쑥의 성은 곧지 않고 비단의 바탕은 검지 않으나, 삼이 붙들어 주고 검은 물이 물들여 곧고 검게 한 것이다. 무릇 사람의 성은 쑥이나 비단과 같아서, 점차 물드는 바에 따라 선악이 변한다.
王良、造父稱為善御,能使不良為良也。如徒能御良,其不良者不能馴服,此則駔工庸師服馴技能,何奇而世稱之?故曰:王良登車,馬不罷駑;堯、舜為政,民無狂愚。傳曰:「堯、舜之民可比屋而封,桀、紂之民可比屋而誅。」斯民也,三代所以直道而行也。
왕량(王良)·조보(造父)가 말을 잘 부린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좋지 않은 말을 좋은 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갓 좋은 말만 부릴 수 있고 좋지 않은 말은 길들여 복종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말 거간꾼이나 평범한 마부의 길들이는 기능이니 무엇이 기이하여 세상이 일컫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왕량이 수레에 오르면 말이 지치거나 둔하지 않고, 요(堯)·순(舜)이 정치를 하면 백성에 미치거나 어리석은 자가 없다고 한다. 전(傳)에 이르기를 「요·순의 백성은 집집마다 봉할 만하고, 걸(桀)·주(紂)의 백성은 집집마다 벨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 백성은 삼대(三代)가 곧은 도로 행한 바이다.
聖主之民如彼,惡主之民如此,竟在化不在性也。聞伯夷之風者,貪夫廉而懦夫有立志;聞柳下惠之風者,薄夫敦而鄙夫寬。徒聞風名,猶或變節,況親接形面相敦告乎!孔門弟子七十之徒,皆任卿相之用,被服聖教,文才雕琢,知能十倍,教訓之功而漸漬之力也。未入孔子之門時,閭巷常庸無奇,其尤甚不率者,唯子路也。世稱子路無恆之庸人,未入孔門時,戴雞佩豚,勇猛無禮,聞誦讀之聲,搖雞奮豚,揚唇吻之音,聒賢聖之耳,惡至甚矣。孔子引而教之,漸漬磨礫,闔導牖進,猛氣消損,驕節屈折,卒能政事,序在四科。斯蓋變性使惡為善之明效也。夫肥沃,土地之本性也。肥而沃者性美,樹稼丰茂。而者性惡,深耕細鋤,厚加糞壤,勉致人功,以助地力,其樹稼與彼肥沃者相似類也。地之高下,亦如此焉。以鍤鑿地,以增下,則其下與高者齊;如復增鍤,則夫下者不徒齊者也,反更為高,而其高者反為下。使人之性有善有惡,彼地有高有下,勉致其教令之善,則將善者同之矣。善以化渥,釀其教令,變更為善。善則且更宜反過於往善,猶下地增加鍤更崇於高地也。賜不受命而貨殖焉,賜本不受天之富命所加,貨財積聚,為世富人者,得貨殖之朮也。夫得其朮,雖不受命,猶自益饒富。性惡之人,益不稟天善性,得聖人之教,志行變化。世稱利劍有千金之价。棠溪、魚腸之屬,龍泉、太阿之輩,其本鋌,山中之恆鐵也。冶工鍛煉,成為利,豈利劍之鍛與煉乃異質哉?工良師巧,煉一數至也。試取東下直一金之劍,更熟鍛煉,足其火,齊其,猶千金之劍也。夫鐵石天然,尚為鍛煉者變易故質,況人含五常之性,賢聖未之熟鍛煉耳,奚患性之不善哉?古貴良醫者,能知篤劇之病所從生起,而以針葯治而已之。如徒知病之名,而坐觀之,何以為奇?
성스러운 군주의 백성은 저와 같고 악한 군주의 백성은 이와 같으니, 결국 교화에 있지 성에 있지 않다. 백이(伯夷)의 풍모를 들은 자는 탐욕스러운 사내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사내가 뜻을 세우며, 유하혜(柳下惠)의 풍모를 들은 자는 박정한 사내가 도타워지고 비루한 사내가 너그러워진다. 한갓 풍모와 이름만 들어도 오히려 혹 절개를 바꾸는데, 하물며 직접 얼굴을 맞대고 서로 도탑게 일러 줌에랴! 공자(孔子) 문하의 제자 칠십 명의 무리는 모두 경상(卿相)의 쓰임을 감당하였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입어 문재(文才)가 다듬어지고 지혜와 능력이 열 배가 된 것은 가르침의 공이요 점차 적셔 든 힘이다.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는 마을의 평범한 사람으로 기이함이 없었고, 그 가운데 특히 심하게 따르지 않은 자는 오직 자로(子路)였다. 세상에서는 자로를 항심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 일컬었으니,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는 수탉 [깃]을 머리에 이고 돼지[가죽]를 차고 용맹하나 예가 없었으며,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닭을 흔들고 돼지를 휘두르며 입술 소리를 높여 현성의 귀를 시끄럽게 하였으니 악함이 지극히 심하였다. 공자가 그를 이끌어 가르쳐 점차 적시고 갈고 닦으며 열어 인도하고 깨우쳐 나아가게 하자, 사나운 기운이 사그라지고 교만한 기세가 꺾여 마침내 정사에 능하여 사과(四科)에 차례를 얻었다. 이는 대개 성을 변하게 하여 악을 선으로 만든 분명한 효험이다. 무릇 기름지고 윤택한 것은 토지의 본성이다. 기름지고 윤택한 것은 성이 아름다워 심은 곡식이 무성하다. [메마른] 것은 성이 나쁘나, 깊이 갈고 잘게 김매며 두텁게 거름을 주고 힘써 사람의 공을 들여 땅의 힘을 도우면, 그 심은 곡식이 저 기름진 땅의 것과 비슷해진다. 땅의 높고 낮음도 이와 같다. 삽으로 땅을 파서 낮은 곳을 돋우면 그 낮은 곳이 높은 곳과 가지런해지고, 만약 다시 삽질을 더하면 저 낮은 곳은 한갓 가지런해질 뿐 아니라 도리어 더 높아지고 높은 곳은 도리어 낮아진다. 가령 사람의 성에 선함과 악함이 있는 것이 저 땅에 높음과 낮음이 있는 것과 같다면, 그 가르침과 명령의 선함을 힘써 이루면 장차 선한 자와 같아질 것이다. 선함으로 두텁게 교화하고 그 가르침과 명령을 빚어내면 변하여 선하게 된다. 선하게 되면 또 도리어 예전의 선한 자를 넘어설 수 있으니, 낮은 땅에 삽질을 더하여 높은 땅보다 더 높아지는 것과 같다. 사(賜)는 명을 받지 않았는데도 재물을 불렸다고 하니, 사는 본래 하늘의 부유한 명이 더해진 것을 받지 않았으나 재물을 쌓아 세상의 부자가 된 것은 재물을 불리는 기술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릇 그 기술을 얻으면 비록 명을 받지 않았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넉넉하고 부유해진다. 성이 악한 사람도 비록 하늘의 선한 성을 받지 못하였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얻으면 뜻과 행실이 변화한다. 세상에서 날카로운 칼은 천금의 값이 있다고 일컫는다. 당계(棠溪)·어장(魚腸)의 부류와 용천(龍泉)·태아(太阿)의 무리도 그 본래의 쇳덩이는 산속의 평범한 쇠이다. 대장장이가 두드리고 단련하여 날카로운 [칼]을 이룬 것이니, 어찌 날카로운 칼의 단련이 바탕을 달리하겠는가? 대장장이가 훌륭하고 장인이 교묘하여 단련을 여러 차례 거듭한 것이다. 시험 삼아 동쪽 시장에서 한 금짜리 칼을 가져다가 더욱 익히 두드리고 단련하여 그 불을 충분히 하고 그 [칼날]을 가지런히 하면 천금의 칼과 같아진다. 무릇 쇠와 돌은 천연의 것인데도 오히려 단련하는 자에 의해 옛 바탕이 바뀌는데, 하물며 사람은 오상(五常)의 성을 머금었으니, 현성이 아직 익히 단련하지 않았을 뿐이지 어찌 성이 선하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옛날에 좋은 의사를 귀하게 여긴 것은 위중한 병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알아 침과 약으로 다스려 낫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갓 병의 이름만 알고 앉아서 보기만 한다면 무엇을 기이하다 하겠는가?
夫人有不善,則乃性命之疾也,無其教治,而欲令變更,豈不難哉! 天道有真偽。真者固自與天相應,偽者人加知巧,亦與真者無以異也。何以驗之?《禹貢》曰「琳琅」者,此則土地所生,真玉珠也。 然而道人消爍五石,作五色之玉,比之真玉,光不殊別,兼魚蚌之珠,與《禹貢》琳皆真玉珠也。然而隨侯以葯作珠,精耀如真,道士之教至,知巧之意加也。陽遂取火於天,五月丙午日中之時,消煉五石,鑄以為器,磨礫生光,仰以向日,則火來至。
무릇 사람에게 착하지 않음이 있는 것은 곧 성과 명의 병이니, 그 가르침과 다스림 없이 변하게 하고자 한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천도(天道)에는 참과 거짓이 있다. 참된 것은 본래 스스로 하늘과 서로 응하고, 거짓된 것은 사람이 지혜와 기교를 더한 것이나 또한 참된 것과 다름이 없다. 무엇으로 이를 증험하는가? 「우공(禹貢)」에서 말하는 「임랑(琳琅)」은 곧 토지가 낳은 참된 옥과 구슬이다. 그런데 도인(道人)이 오석(五石)을 녹여 오색의 옥을 만들면 참된 옥에 견주어 광채가 다르지 않고, 아울러 물고기와 조개의 구슬도 「우공」의 임[랑]과 같이 모두 참된 옥과 구슬이다. 그런데 수후(隨侯)가 약으로 구슬을 만들자 정밀한 광채가 참된 것과 같았으니, 도사의 가르침이 지극하고 지혜와 기교의 뜻이 더해진 것이다. 양수(陽遂)는 하늘에서 불을 취하는데, 5월 병오일(丙午日) 한낮에 오석을 녹여 부어 그릇을 만들고 갈고 닦아 빛이 나게 하여 위로 해를 향하면 불이 이른다.
〔此〕真取火之道也。今妄以刀劍之鉤月,摩拭朗白,仰以向日,亦得火焉。夫鉤月非陽遂也,所以耐取火者,摩拭之所致也。今夫性惡之人,使與性善者同類乎,可率勉之令其為善;使之異類乎,亦可令與道人之所鑄玉、隨侯之所作珠、人之所摩刀劍鉤月焉,教導以學,漸漬以德,亦將日有仁義之操。黃帝與炎帝爭為天子,教熊、羆、貔、虎以戰於阪泉之野,三戰得志,炎帝敗績。堯以天下讓舜,鯀為諸侯,欲得三公,而堯不聽,怒其猛獸,欲以為亂,比獸之角可以為城,舉尾以為旌,奮心盛氣,阻戰為強。夫禽獸與人殊形,猶可命戰,況人同類乎!推此以論,百獸率舞,潭魚出聽,六馬仰秣,不復疑矣。異類以殊為同,同類以鈞為異,所由不在於物,在於人也。凡含血氣者,教之所以異化也。三苗之民,或賢或不肖,堯、舜齊之,恩教加也。
(比)[此]가 참으로 불을 취하는 방법이다. 지금 함부로 칼의 갈고리 모양 날[鉤月]을 갈고 닦아 환하게 희게 하여 위로 해를 향하게 해도 불을 얻는다. 무릇 구월(鉤月)은 양수가 아닌데도 불을 취할 수 있는 까닭은 갈고 닦은 결과이다. 지금 성이 악한 사람이 성이 선한 자와 같은 부류라면 이끌고 권면하여 선하게 할 수 있고, 다른 부류라 하더라도 도인이 녹여 만든 옥, 수후가 만든 구슬, 사람이 간 칼의 구월처럼 될 수 있으니, 배움으로 가르치고 이끌며 덕으로 점차 적시면 또한 장차 날로 인의(仁義)의 지조를 갖게 될 것이다. 황제(黃帝)가 염제(炎帝)와 천자 자리를 다툴 때, 곰·큰곰·비휴·범을 가르쳐 판천(阪泉)의 들에서 싸우게 하여 세 번 싸워 뜻을 얻으니 염제가 패하였다. 요가 천하를 순에게 물려주자, 곤(鯀)은 제후로서 삼공(三公)이 되고자 하였으나 요가 들어주지 않으니, 사나운 짐승들을 성나게 하여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는데, 짐승의 뿔을 나란히 하면 성을 삼을 만하고 꼬리를 들면 깃발을 삼을 만하여, 마음을 떨치고 기세를 성하게 하여 험지에 의지해 싸워 강함을 삼았다. 무릇 금수는 사람과 형체가 다른데도 오히려 명하여 싸우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은 같은 부류임에랴! 이를 미루어 논하면, 온갖 짐승이 이끌려 춤추고 못의 물고기가 나와 듣고 여섯 말이 고개를 들고 꼴을 먹는다는 것을 다시 의심하지 않는다. 다른 부류는 다름으로써 같아지고, 같은 부류는 고름으로써 달라지니, 그 말미암는 바는 사물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 무릇 혈기를 머금은 것은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달리 교화된다. 삼묘(三苗)의 백성은 혹 어질고 혹 어질지 못하였으나 요·순이 그들을 가지런히 한 것은 은혜와 가르침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楚、越之人,處庄、岳之間,經歷歲月,變為舒緩,風俗移也。故曰:齊舒緩,秦慢易,楚促急,燕戇投。以庄、岳言之,四國之民,更相出入,久居單處,性必變易。 夫性惡者,心比木石。木石猶為人用,況非木石?在君子之跡,庶几可見。有痴狂之疾,歌啼於路,不曉東西,不睹燥濕,不覺疾病,不知飢飽,性已毀傷,不可如何。前無所觀,卻無所畏也。是故王法不廢學校之官,不除獄理之吏,欲令凡眾見禮儀之教。學校勉其前,法禁防其後,使丹朱之志亦將可勉。何以驗之?三軍之士,非能制也;勇將率勉,視死如歸。且闔廬嘗試其士五湖之側,皆加刃於肩,血流至地。句踐亦試其士於寢宮之庭,赴火死者,不可勝數。夫刃火,非人性之所貪也,二主激率,念不顧生。是故軍之法,輕刺血。孟賁勇也,聞軍令懼。是故叔孫通制定禮儀,拔劍爭功之臣,奉禮拜伏,初驕倨而後遜順,教威德,變易性也。不患性惡,患其不服聖教,自遇而以生禍也。
초(楚)·월(越)의 사람이 장(莊)·악(嶽)의 사이에 살며 세월을 지내면 변하여 느긋해지니, 풍속이 옮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제(齊)는 느긋하고, 진(秦)은 태만하고 경솔하며, 초(楚)는 성급하고, 연(燕)은 우직하고 고집스럽다고 한다. 장·악으로 말하면, 네 나라의 백성이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오래 살고 홀로 머물면 성이 반드시 바뀐다. 무릇 성이 악한 자는 마음이 나무와 돌에 견줄 만하다. 나무와 돌도 오히려 사람에게 쓰이는데, 하물며 나무와 돌이 아닌 [사람]이겠는가? 군자의 자취에 있으면 거의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고 미친 병이 있어 길에서 노래하고 울며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고, 마르고 젖은 것을 보지 못하며, 아프고 병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굶주리고 배부른 것을 알지 못하면, 성이 이미 훼손되어 어찌할 수 없다. 앞으로는 볼 바가 없고 뒤로는 두려워할 바가 없다. 이 때문에 왕법(王法)은 학교의 관리를 폐하지 않고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를 없애지 않으니, 뭇사람으로 하여금 예의의 가르침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학교는 앞에서 권면하고 법금은 뒤에서 막으니, 단주(丹朱)의 뜻도 장차 권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이를 증험하는가? 삼군의 병사는 제어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나, 용맹한 장수가 이끌고 권면하면 죽음을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 또 합려(闔廬)는 일찍이 오호(五湖) 가에서 그 병사들을 시험하였는데, 모두 칼을 어깨에 대어 피가 흘러 땅에 이르렀다. 구천(句踐)도 침궁의 뜰에서 그 병사들을 시험하였는데, 불에 뛰어들어 죽은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무릇 칼과 불은 사람의 성이 탐하는 것이 아닌데, 두 군주가 격려하고 이끌자 생각이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군법에는 [칼로] 찔러 피를 흘리는 것을 가벼이 여긴다. 맹분(孟賁)은 용사였으나 군령을 들으면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숙손통(叔孫通)이 예의를 제정하자, 칼을 뽑아 공을 다투던 신하들이 예를 받들어 절하고 엎드렸으니, 처음에는 교만하고 거만하였으나 뒤에는 겸손하고 순종하게 된 것은 가르침의 위엄과 덕이 성을 바꾼 것이다. 성이 악함을 걱정하지 않고, 그가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스스로 [일을] 만나 화를 낳을까 걱정한다.
豆麥之種與稻梁殊,然食能去飢。小人君子稟性異類乎?譬諸五谷皆為用,實不異而效殊者,稟氣有厚泊,故性有善惡也。殘則〔受〕仁之氣泊,而怒則稟勇渥也。仁泊則戾而少〔慈〕,勇渥則猛而無義,而又和氣不足,喜怒失時,計慮輕愚,妄行之人,罪故為惡。人受五常,含五髒,皆具於身。稟之泊少,故其操行不及善人,猶〔酒〕或厚或泊也。非厚與泊殊其釀也,曲孽多少使之然也。是故酒之泊厚,同一曲孽;人之善惡,共一元氣,氣有少多,鼓性有賢愚。
콩과 보리의 종자는 벼·기장과 다르나, 먹으면 굶주림을 없앨 수 있다. 소인과 군자는 성을 받은 것이 다른 부류인가? 비유하면 오곡이 모두 쓰임이 되는 것과 같으니, 실제로는 다르지 않은데 효과가 다른 것은 받은 기에 두터움과 엷음이 있기 때문이므로 성에 선악이 있는 것이다. 잔인한 자는 (授)[受]한 인(仁)의 기가 엷고, 성내는 자는 받은 용(勇)이 두텁다. 인이 엷으면 사납고 (愈)[자애]가 적으며, 용이 두터우면 사납고 의리가 없으며, 또 화기(和氣)가 부족하여 기쁨과 성냄이 때를 잃고 헤아림이 가볍고 어리석으니, 망령되이 행하는 사람은 죄 때문에 악이 된다. 사람은 오상(五常)을 받고 오장(五臟)을 머금어 모두 몸에 갖추고 있다. 받은 것이 엷고 적으므로 그 행실이 선한 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술이] 혹 진하고 혹 묽은 것과 같다. 진함과 묽음이 그 빚는 법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누룩의 많고 적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술의 묽고 진함은 같은 누룩에서 나오고, 사람의 선악은 같은 원기(元氣)에서 나오니, 기에 적고 많음이 있으므로 성에 어짊과 어리석음이 있다.
西門豹急,佩韋以自緩;董安於緩,帶弦以自促。急之與緩,俱失中和,然而韋弦附身,成為完具之人。能納韋弦之教,補接不足,則豹、安於之名,可得參也。貧劣宅屋不具牆壁宇〔闥〕,人指訾之。如財貨富愈,起屋筑牆,以自蔽鄣,為人具宅,人弗復非。魏之行田百畝,鄴獨二百,西門豹灌以漳水,成為膏腴,則畝收一鍾。夫人之質猶鄴田,道教猶漳水也。患不能化,不患人性之難率也。雒陽城中之道無水,水工激上洛中之水,日夜馳流,水工之功也。由此言之,迫近君子,而仁義之道數加於身,孟母之徙宅,蓋得其驗。人間之水污濁,在野外者清潔,俱為一水,源從天涯,或濁或清,所在之勢使之然也。南越王趙佗,本漢賢人也,化南夷之俗,背畔王制,椎髻箕坐,好之若性。陸賈說以漢德,懼以聖威,蹶然起坐,心覺改悔,奉制稱蕃,其於椎髻箕坐也,惡之若性。前則若彼,後則若此。由此言之,亦在於教,不獨在性也。
서문표(西門豹)는 성급하여 부드러운 가죽을 차서 스스로 느긋하게 하였고, 동안우(董安於)는 느긋하여 활시위를 띠어 스스로 재촉하였다. 성급함과 느긋함은 모두 중화(中和)를 잃은 것이나, 가죽과 활시위를 몸에 붙여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가죽과 활시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다면, 서문표·동안우의 이름에 나란히 할 수 있다. 가난하고 모자라 집에 담장과 처마와 (達)[문]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헐뜯는다. 만약 재물이 넉넉해져 집을 짓고 담을 쌓아 스스로 가리고 막아 사람이 갖출 집을 갖추면, 사람들이 다시는 비난하지 않는다. 위(魏)에서 밭을 나누어 줄 때 [한 집에] 백 무(畝)였는데 업(鄴)만 홀로 이백 무였으니, 서문표가 장수(漳水)를 끌어 대어 기름진 땅이 되게 하자 무마다 한 종(鍾)을 거두었다. 무릇 사람의 바탕은 업의 밭과 같고, 도의 가르침은 장수와 같다. 교화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지 사람의 성을 이끌기 어려움을 걱정할 것이 아니다. 낙양(雒陽) 성안의 길에는 물이 없었는데, 수공(水工)이 낙수(洛水)의 물을 끌어 올리자 밤낮으로 내달려 흘렀으니, 수공의 공이다. 이로써 말하면, 군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인의의 도가 자주 몸에 더해지는 것이니, 맹자 어머니가 집을 옮긴 것에서 대개 그 증험을 얻는다. 인간 세상의 물은 더럽고 탁하며 들 밖에 있는 것은 맑고 깨끗하니, 모두 같은 물로서 근원이 하늘 끝에서 나오나 혹 탁하고 혹 맑은 것은 있는 곳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는 본래 한(漢)의 어진 사람이었으나 남쪽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어 왕의 제도를 배반하고 상투를 방망이 모양으로 틀고 두 다리를 뻗고 앉는 것을 본성처럼 좋아하였다. 육가(陸賈)가 한의 덕으로 설득하고 성스러운 위엄으로 두렵게 하자, 벌떡 일어나 앉아 마음으로 깨닫고 뉘우쳐 제도를 받들고 번국(藩國)을 칭하였으며, 방망이 상투와 다리 뻗고 앉는 것을 본성처럼 싫어하였다. 앞에서는 저와 같고 뒤에서는 이와 같았다. 이로써 말하면, 또한 가르침에 있지 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