凡人仕宦有稽留不進,行節有毀傷不全,罪過有累積不除,聲名有暗昧不明,才非下,行非悖也;有知非昏,策非昧也;逢遭外禍,累害之也。非唯人行,凡物皆然。生動之類,咸被累害。累害自外,不由其內。夫不本累害所從生起,而徒歸責於被累害者,智不明,暗塞於理者也.物以春生,人保之;以秋成,人必不能保之。卒然牛馬踐根,刀鐮割莖,生者不育,至秋不成。不成之類,遇害不遂,不得生也。夫鼠涉飯中,捐而不食。捐飯之味,與彼不污者鈞,以鼠為害,棄而不御。君子之累害,與彼不育之物、不御之飯同一實也。俱由外來,故為累害。
무릇 사람이 벼슬살이에 머물러 나아가지 못함이 있고, 행실과 절개에 훼손되어 온전하지 못함이 있으며, 죄과에 누적되어 제거되지 않음이 있고, 명성에 어두워 밝지 못함이 있는 것은, 재능이 낮아서가 아니고 행실이 어그러져서가 아니며, 지혜가 있어 어둡지 않고 계책이 어리석지 않은데도, 바깥의 재화를 만나 누해(累害)를 입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실뿐 아니라 무릇 사물이 모두 그러하다. 살아 움직이는 무리는 모두 누해를 입는다. 누해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지 그 안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누해가 생겨나는 근원을 따지지 않고 한갓 누해를 입은 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지혜가 밝지 못하여 이치에 어둡고 막힌 자이다. 사물은 봄에 나면 사람이 그것을 보전하지만, 가을에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보전할 수는 없다. 갑자기 소나 말이 뿌리를 밟고 칼과 낫이 줄기를 자르면 난 것이 자라지 못하여 가을에 이르러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무리는 해를 만나 이루지 못하여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쥐가 밥 가운데를 지나가면 버리고 먹지 않는다. 버린 밥의 맛은 저 더럽혀지지 않은 것과 같으나, 쥐를 해로 여겨 버리고 먹지 않는다. 군자의 누해는 저 자라지 못한 사물, 먹지 않는 밥과 실상이 같다. 모두 바깥에서 오므로 누해라 한다.
修身正行,不能來福;戰栗戒慎,不能避禍。禍福之至,幸不幸也。故曰:得非己力,故謂之福;來不由我,故謂之禍。不由我者,謂之何由?由鄉里與朝廷也。夫鄉里有三累,朝廷有三害。累生於鄉里,害發於朝廷,古今才洪行淑之人遇此多矣。 何謂三累三害?凡人操行,不能慎擇友,友同心恩篤,異心薄,薄怨恨,毀傷其行,一累也。人才高下,不能鈞同,同時并進,高者得榮,下者慚恚,毀傷其行,二累也。人之交游,不能常歡,歡則相親,忿則疏遠,遠怨恨,毀傷其行,三累也。位少人眾,仕者爭進,進者爭位,見將相毀,增加傅致,將昧不明,然納其言,一害也。將吏異好,清濁殊操,清吏增郁郁之白,舉涓涓之言,濁吏懷恚恨,徐求其過,因纖微之謗,被以罪罰,二害也。將或幸佐吏之身,納信其言,佐吏非清節,必拔人越次,迕失其意,毀之過度,清正之仕,抗行伸志,遂為所憎,毀傷於將,三害也。夫未進也身被三累,已用也身蒙三害,雖孔丘、墨翟不能自免,顏回、曾參不能全身也。
몸을 닦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도 복을 오게 할 수 없고, 두려워 떨며 경계하고 삼가도 화를 피할 수 없다. 화와 복이 이르는 것은 행(幸)·불행(不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얻음이 자기 힘에 말미암지 않으므로 이를 복이라 하고, 옴이 나에게 말미암지 않으므로 이를 화라 한다.” 하였다. 나에게 말미암지 않는 것은 무엇에 말미암는다고 하는가? 향리와 조정에 말미암는다. 향리에는 세 가지 누(累)가 있고, 조정에는 세 가지 해(害)가 있다. 누는 향리에서 생기고 해는 조정에서 일어나니, 예나 지금이나 재능이 크고 행실이 맑은 사람이 이를 만난 경우가 많다. 무엇을 세 가지 누와 세 가지 해라 하는가? 무릇 사람의 조행은 벗을 신중히 가릴 수 없으니, 벗이 마음이 같으면 은혜가 두텁고 마음이 다르면 [은혜가] 얇으며, 얇으면 원망하고 한스러워하여 그의 행실을 훼손하니, 이것이 첫째 누이다. 사람의 재능의 높고 낮음은 고르게 같을 수 없으니, 동시에 함께 나아가면 높은 자는 영화를 얻고 낮은 자는 부끄러워하며 성내어 그의 행실을 훼손하니, 이것이 둘째 누이다. 사람의 사귐은 늘 즐거울 수 없으니, 즐거우면 서로 친하고 분하면 소원해지며, 멀어지면 원망하고 한스러워하여 그의 행실을 훼손하니, 이것이 셋째 누이다. 자리는 적고 사람은 많아 벼슬하는 자가 다투어 나아가고 나아간 자가 자리를 다투어, 장(將)을 뵙고 서로 헐뜯으며 [허물을] 보태고 끌어다 붙이는데, 장이 어두워 밝지 못하여 그 말을 받아들이니, 이것이 첫째 해이다. 장리(將吏)는 좋아하는 바가 다르고 청탁(淸濁)의 조행이 달라서, 맑은 관리는 성대한 결백함을 더하고 맑디맑은 말을 들어 올리니, 탁한 관리는 성냄과 원한을 품어 천천히 그의 허물을 찾아내어 미세한 비방을 빌미로 죄벌을 입히니, 이것이 둘째 해이다. 장이 혹 보좌하는 관리[佐吏]의 몸을 총애하여 그 말을 받아들이고 믿는데, 좌리가 맑은 절개가 아니면 반드시 사람을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고, 그 뜻을 거스르면 도를 넘게 헐뜯으니, 맑고 바른 선비는 행실을 높이고 뜻을 펴다가 마침내 미움을 받아 장에게 훼손당하니, 이것이 셋째 해이다. 아직 나아가지 않았을 때는 몸이 세 가지 누를 입고, 이미 쓰였을 때는 몸이 세 가지 해를 입으니, 비록 공구(孔丘)·묵적(墨翟)이라도 스스로 면할 수 없고, 안회(顏回)·증삼(曾參)이라도 몸을 온전히 할 수 없다.
動百行,作萬事,嫉妒之人,隨而云起,枳棘鉤挂容體,蜂蠆之党,啄螫懷操,豈徒六哉!六者章章,世曾不見。夫不原士之操行有三累,仕宦有三害,身完全者謂之潔,被毀謗者謂之辱;官升進者謂之善,位廢退者謂之惡;完全升進,幸也,而稱之;毀謗廢退,不遇也,而訾之:用心若此,必為三累三害也.論者既不知〔被〕累害者行賢潔也,以塗博泥,以黑點繒,孰有知之?清受塵,白取垢,青繩所污,常在練素。處顛者危,勢丰者虧,頹墜之類,常在懸垂。屈平潔白,邑犬群吠,吠所怪也;非俊疑杰,固庸能也。偉士坐以俊杰之才,招致群吠之聲。夫如是,豈宜更勉奴下,循不肖哉!不肖奴下,非所勉也。豈宜更偶俗全身以弭謗哉!偶俗全身,則鄉原也。鄉原之人,行全無闕,非之無舉,刺之無刺也。此又孔子之所罪,孟軻之所愆也。
온갖 행실을 움직이고 만 가지 일을 지으면 질투하는 사람이 따라서 구름처럼 일어나니, 가시나무가 몸에 걸리고 벌과 전갈의 무리가 조행을 품은 이를 쪼고 쏘는 것이 어찌 여섯 가지뿐이겠는가! 여섯 가지가 뚜렷한데도 세상은 일찍이 보지 못한다. 선비의 조행에 세 가지 누가 있고 벼슬살이에 세 가지 해가 있음을 근원까지 따지지 않고, 몸이 온전한 자를 깨끗하다 하고 훼방을 입은 자를 욕되다 하며, 관직이 오른 자를 선하다 하고 지위에서 폐출된 자를 악하다 한다. 온전하고 승진한 것은 행운인데도 그를 칭찬하고, 훼방받고 폐출된 것은 만나지 못한 것인데도 그를 헐뜯으니, 마음 씀이 이와 같으면 반드시 세 가지 누와 세 가지 해가 된다. 논하는 자들이 이미 누해를 [입은] 자의 행실이 어질고 깨끗함을 알지 못하니, 진흙으로 흙벽에 바르고 먹으로 비단에 점을 찍은 것을 누가 알겠는가? 맑은 것은 먼지를 받고 흰 것은 때를 타니, 푸른 파리[靑繩]가 더럽히는 것은 늘 흰 비단에 있다. 꼭대기에 처한 자는 위태롭고 형세가 풍성한 자는 이지러지니, 무너져 떨어지는 무리는 늘 매달린 곳에 있다. 굴평(屈平)이 깨끗하고 희니 고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었는데, 짖는 것은 괴이하게 여기는 바이다. 준걸을 비방하고 호걸을 의심하는 것은 본디 용렬한 자들의 짓이다. 훌륭한 선비는 준걸의 재능 때문에 뭇 짖는 소리를 불러들인다. 이와 같다면 어찌 다시 노비 같은 아랫사람이 되기를 힘쓰고 불초함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불초하고 노비 같은 아랫사람은 힘쓸 바가 아니다. 어찌 다시 세속에 영합하여 몸을 온전히 함으로써 비방을 그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세속에 영합하여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은 곧 향원(鄉原)이다. 향원인 사람은 행실이 온전하여 흠이 없으니, 비난하려 해도 들 것이 없고 꼬집으려 해도 꼬집을 것이 없다. 이 또한 공자가 죄로 여긴 바이고 맹가가 허물로 여긴 바이다.
古賢美極,無以衛身。故循性行以俟累害者,果賢潔之人也,極累害之謗,而賢潔之實見焉。立賢潔之跡,毀謗之塵安得之生?弦者思折伯牙之指,御者願摧王良之手。何則?欲專良善之名,惡彼之勝己也。是故魏女色艷,鄭袖〔劓〕之;朝吳忠貞,無忌逐之。戚施彌妒,蘧除多佞。是故濕堂不灑塵,卑屋不蔽風;風衝之物不得育,水湍之岸不得峭。如是,牖里、陳蔡可得知,而沉江蹈河也。以軼才取容媚於俗,求全功名於將,不遭鄧析之禍,取子胥之誅,幸矣。孟賁之尸,人不刃者,氣絕也。死灰百斛,人不沃者,光滅也。動身章智,顯光氣於世;奮志敖党,立卓異於俗,固常通人所讒妒也。以方心偶俗之累,求益反損。蓋孔子所以憂心,孟軻所以惆悵也。
옛 어진 이는 아름다움이 지극하였으나 몸을 지킬 방도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품과 행실을 따르며 누해를 기다리는 자가 과연 어질고 깨끗한 사람이니, 누해의 비방이 극에 달하면 어질고 깨끗한 실상이 드러난다. 어질고 깨끗한 자취를 세웠는데 훼방의 먼지가 어찌 생겨날 수 있겠는가? 현악기를 타는 자는 백아(伯牙)의 손가락을 꺾고 싶어 하고, 수레를 모는 자는 왕량의 손을 부수기를 바란다. 어째서인가? 좋고 훌륭하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고자 하여 저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위(魏)나라 여인이 용색이 고우니 정수(鄭袖)가 그의 코를 (鼻)[劓] 베었고, 조오(朝吳)가 충성스럽고 곧으니 무기(無忌)가 그를 쫓아냈다. 척시(戚施)는 더욱 질투하고 거저(蘧除)는 아첨이 많다. 이 때문에 축축한 집에는 먼지를 쓸지 않고 낮은 집은 바람을 가리지 않으며, 바람이 들이치는 곳의 사물은 자랄 수 없고 물살이 급한 언덕은 가파를 수 없다. 이와 같으니 유리(牖里)와 진채(陳蔡)의 [곤액을] 알 수 있고, 강에 빠지고 황하에 뛰어든 일도 [알 수 있다]. 뛰어난 재능으로 세속에 용납되고 아첨을 취하며 장에게서 공명을 온전히 구하여, 등석(鄧析)의 화를 만나지 않고 자서(子胥)의 주살을 취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맹분(孟賁)의 시신을 사람들이 칼로 찌르지 않는 것은 기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죽은 재 백 곡(斛)에 사람들이 물을 붓지 않는 것은 빛이 꺼졌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여 지혜를 드러내고 세상에 빛과 기운을 드러내며, 뜻을 떨쳐 무리에게 오만하고 세속에서 탁월함과 기이함을 세우면, 본디 늘 사람들이 참소하고 질투하는 바가 된다. 곧은 마음으로 세속에 영합하는 누로써 보탬을 구하나 도리어 손해를 본다. 대개 공자가 근심한 까닭이고 맹가가 슬퍼한 까닭이다.
德鴻者招謗,為士者多口。 以休熾之聲,彌口舌之患,求無危傾之害,遠矣。臧倉之毀,未嘗絕也;公伯寮之溯,未嘗滅也。垤成丘山,污為江河矣。夫如是市虎之訛,投杼之誤不足怪,則玉變為石,珠化為礫,不足詭也。何則?昧心冥冥之知使之然也。文王所以為糞土,而惡來所以為金玉也。非紂憎聖而好惡也,心知惑蔽,蔽惑不能審,則微子十去,比干五剖,未足痛也。故三監讒聖人,周公奔楚;後母毀孝子,伯奇放流。當時周世孰有不惑乎?後鴟作而黍離興,諷詠之者,乃悲傷之。故無雷風之變,周公之惡不滅;當夏不隕霜,鄒〔衍〕之罪不除。德不能感天,誠不能動變,君子篤信審己也,安能遏累害於人?聖賢不治名,害至不免辟,形章墨短,掩匿白長;不理身冤,不弭流言,受垢取毀,不求潔完。故惡見而善不彰,行缺而跡不顯。邪偽之人,治身以巧俗,修詐以偶眾。猶漆盤盂之工,穿牆不見;弄丸劍之倡,手指不知也。世不見短,故共稱之;將不聞惡,故顯用之。夫如是,世俗之所謂賢潔者,未必非惡;所謂邪污者,未必非善也。
덕이 큰 자는 비방을 부르고, 선비된 자는 [남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아름답고 성대한 명성으로 입과 혀의 우환을 그치게 하여 위태롭게 기울어지는 해가 없기를 구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 장창(臧倉)의 헐뜯음은 일찍이 끊어진 적이 없고, 공백료(公伯寮)의 참소는 일찍이 사라진 적이 없다. 개밋둑이 쌓여 언덕과 산이 되고, 웅덩이가 강과 하천이 된다. 이와 같으니 저자에 범이 있다는 헛소문과 베틀의 북을 던진 오해는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되고, 옥이 변하여 돌이 되고 구슬이 변하여 자갈이 되는 것도 기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어째서인가? 어두운 마음의 몽매한 지혜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왕(文王)이 분토(糞土)가 되고 악래(惡來)가 금옥(金玉)이 된 까닭이다. 주(紂)가 성인을 미워하고 악인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지혜가 미혹되고 가려졌기 때문이니, 가려지고 미혹되어 살필 수 없으면 미자(微子)가 열 번 떠나고 비간(比干)이 다섯 번 쪼개져도 애통해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삼감(三監)이 성인을 참소하니 주공(周公)이 초(楚)로 달아났고, 계모가 효자를 헐뜯으니 백기(伯奇)가 쫓겨나 떠돌았다. 당시 주나라 세상에 누가 미혹되지 않았겠는가? 뒤에 「치효(鴟鴞)」가 지어지고 「서리(黍離)」가 일어났으니, 그것을 풍자하여 읊은 자들은 곧 이를 슬퍼하였다. 그러므로 우레와 바람의 변고가 없었다면 주공의 악명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면 추(鄒)(行)[衍]의 죄는 제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덕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고 정성이 변고를 움직일 수 없다면, 군자는 독실하게 믿으며 자기를 살필 뿐이니 어찌 남에게서 오는 누해를 막을 수 있겠는가? 성현은 이름을 다스리지 않아 해가 이르러도 피하지 않으니, 형체상 검은 단점이 드러나고 흰 장점은 가려 숨겨진다. 몸의 억울함을 해명하지 않고 떠도는 말을 그치게 하지 않으며, 때를 받고 훼방을 취하며 깨끗하고 온전하기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은 드러나고 선은 드러나지 않으며, 행실은 결함이 있고 자취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악하고 거짓된 사람은 몸을 다스려 세속에 교묘하게 하고, 속임을 닦아 뭇사람에게 영합한다. 마치 쟁반과 사발에 옻칠하는 장인이 뚫은 틈을 보이지 않고, 구슬과 칼을 놀리는 광대의 손가락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세상은 단점을 보지 못하므로 함께 그를 칭찬하고, 장은 악을 듣지 못하므로 그를 드러내 쓴다. 이와 같다면 세속이 이른바 어질고 깨끗하다는 자가 반드시 악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이른바 사악하고 더럽다는 자가 반드시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或曰:「言有招患,行有召恥,所在常由小人。」夫小人性患恥者也,含邪而生,懷偽而游,沐浴累害之中,何招召之有?故夫火生者不傷〔燥〕,水居者無溺患。火不苦熱,水不痛寒,氣性自然焉,招之? 君子也,以忠言招患,以高行招恥,何世不然!然而太山之惡,君子不得名;毫髪之善,小人不得有也。以玷污言之,清受塵而白取垢;以毀謗言之,貞良見妒,高奇見噪;以遇罪言之,忠言招患,高行招恥;以不純言之,玉有瑕而珠有毀。陳留〔焦〕君〔貺〕,名稱兗州,行完跡潔,無纖芥之毀;及其當為從事,刺史焦康絀而不用。夫未進也被三累,已用也蒙三害,雖孔丘、墨翟不能自免,顏回、曾參不能全身也。何則?眾好純譽之人,非真賢也。公侯已下,玉石雜糅。賢士之行,善惡相苞。夫采玉者破石拔玉,選士者棄惡取善。夫如是,累害之人負世以行,指擊之者從何往哉!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말에는 우환을 부름이 있고 행실에는 치욕을 부름이 있으니, 그 소재는 늘 소인에게서 말미암는다.” 하였다. 소인은 본성이 우환과 치욕인 자이니, 사악함을 품고 태어나고 거짓을 품고 노닐며 누해 가운데서 목욕하니, 어찌 부르고 초래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에서 사는 것은 (濕)[燥]함에 상하지 않고, 물에 사는 것은 빠질 우환이 없다. 불은 뜨거움을 괴로워하지 않고 물은 차가움을 아파하지 않으니, 기의 성질이 자연히 그러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부르겠는가? 군자는 충언으로 우환을 부르고 고상한 행실로 치욕을 부르니, 어느 세상인들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태산 같은 악이라도 군자는 [그] 이름을 얻지 않고, 털끝 같은 선이라도 소인은 가질 수 없다. 더럽힘으로 말하면 맑은 것이 먼지를 받고 흰 것이 때를 타는 것이요, 훼방으로 말하면 곧고 어진 이가 질투를 받고 높고 뛰어난 이가 떠들썩한 비난을 받는 것이며, 죄를 만남으로 말하면 충언이 우환을 부르고 고상한 행실이 치욕을 부르는 것이요, 순수하지 않음으로 말하면 옥에 티가 있고 구슬에 흠이 있는 것이다. (焦)진류(陳留)[焦]군(君)(兄)[貺]은 연주(兗州)에서 이름이 알려졌고 행실이 온전하고 자취가 깨끗하여 티끌만 한 훼방도 없었는데, 그가 종사(從事)가 되어야 할 때에 이르러 자사(刺史) 초강(焦康)이 물리치고 쓰지 않았다. 아직 나아가지 않았을 때는 세 가지 누를 입고, 이미 쓰였을 때는 세 가지 해를 입으니, 비록 공구·묵적이라도 스스로 면할 수 없고, 안회·증삼이라도 몸을 온전히 할 수 없다. 어째서인가? 뭇사람이 좋아하는 순전한 명예의 사람은 참된 어진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후(公侯) 이하는 옥과 돌이 뒤섞여 있다. 어진 선비의 행실은 선과 악이 서로 감싸고 있다. 옥을 캐는 자는 돌을 깨뜨려 옥을 뽑아내고, 선비를 고르는 자는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한다. 이와 같다면 누해를 입은 사람은 세상을 등에 지고 행하니, 그를 손가락질하고 공격하는 자들은 어디로 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