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性者,人治之本,禮樂所由生也。故原情性之極,禮為之防,樂為之節。性有卑謙辭讓,故制禮以適其宜;情有好惡喜怒哀樂,故作樂以通其敬。即所以制,樂所為作者,情與性也。昔儒舊生,著作篇章,莫不論說,莫能實定。 周人世碩,以為人性有善有惡,舉人之善性,養而致之則善長;性惡,養而致之則惡長。如此,則性各有陰陽,善惡在所養焉。故世子作《養書》一篇。密子賤、漆雕開、公孫尼子之徒,亦論情性,與世子相出入,皆言性有善有惡。
정(情)과 성(性)은 사람을 다스리는 근본이며 예악(禮樂)이 말미암아 생겨난 바이다. 그러므로 정과 성의 끝을 따져서 예로 막고 악으로 절제한다. 성에는 낮추고 겸손하며 사양하는 것이 있으므로 예를 제정하여 그 마땅함에 맞게 하고, 정에는 좋아함·미워함·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있으므로 악을 지어 그 공경을 통하게 한다. 예가 제정되는 까닭과 악이 지어지는 까닭은 정과 성이다. 옛 유자와 옛 학자들이 편장(篇章)을 지으면서 논하여 말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실상을 확정한 이는 없었다. 주(周)나라 사람 세석(世碩)은 인성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고 여겨, 사람의 선한 성을 들어 길러서 이루면 선이 자라고, 악한 성을 길러서 이루면 악이 자란다고 하였다. 이와 같다면 성에는 각각 음양이 있고, 선악은 기르는 바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세자(世子)는 『양서(養書)』 한 편을 지었다. 복자천(宓子賤)·칠조개(漆雕開)·공손니자(公孫尼子)의 무리도 정과 성을 논하였는데, 세자와 서로 드나들어 모두 성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고 말하였다.
孟子作性善之篇,以為人性皆善,及其不善,物亂之也。謂人生於天地,皆稟善性,長大與物交接者,放縱悖亂,不善日以生矣。若孟子之言,人幼小之時,無有不善也。微子曰「我舊云孩子,王子不出。」 紂為孩子時,微子睹其不善之性。性惡不出眾庶,長大為亂不變,故云也。羊舌食我初生之時,叔姬視之,及堂,聞其啼聲而還,曰:「其聲,豺狼之聲也。野心無親,非是莫滅羊舌氏。」隧不肯見。及長,祁勝為亂,食我與焉。
맹자(孟子)는 성선(性善)의 편을 지어, 인성은 모두 선하며 선하지 않게 되는 것은 사물이 어지럽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람은 천지에서 태어나 모두 선한 성을 받았는데, 자라서 사물과 접하면서 방종하고 어그러져 불선이 날로 생긴다고 하였다. 맹자의 말대로라면 사람이 어릴 때에는 선하지 않은 이가 없다. [그러나] 미자(微子)는 「나는 예전에 [주가] 어린아이일 때 말하기를, 왕자(王子)가 [왕위에] 나서지 않기를 [바랐다].」라고 하였다. 주(紂)가 어린아이였을 때 미자가 그의 선하지 않은 성을 보았다. 성의 악함이 뭇 백성보다 뛰어나지 않았고, 자라서 어지럽힘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양설식아(羊舌食我)가 처음 태어났을 때 숙희(叔姬)가 그를 보러 당(堂)에 이르렀다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 돌아와 말하기를 「그 소리는 승냥이와 이리의 소리이다. 야심이 있어 친함이 없으니, 이 아이가 아니면 양설씨를 멸할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끝내 보려 하지 않았다. 자라서 기승(祁勝)이 난을 일으키자 식아가 거기에 가담하였다.
國人殺食我。羊舌氏由是滅矣。紂之惡在孩子之時,食我之亂見始生之聲。孩子始生,未與物接,誰令悖者?丹朱〔生〕於唐宮,商均生於虞室。唐、虞之時,可比屋而封,所與接者,必多善矣。二帝之旁,必多賢也。然而丹朱傲,商均虐,并失帝統,歷世為戒。且孟子相人眸子焉,心清而眸子了,心濁而眸子。人生目輒了,了稟之於天,不同氣也;非幼小之時了,長大與人接,乃更也。性本自然,善惡有質。孟子之言情性,未為實也。然而性善之論,亦有所緣。
나라 사람들이 식아를 죽였다. 양설씨는 이로 말미암아 멸하였다. 주의 악은 어린아이 때에 있었고, 식아의 난은 처음 태어났을 때의 소리에서 드러났다.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나 아직 사물과 접하지 않았는데 누가 어그러지게 하였는가? 단주(丹朱)는 당(唐)의 궁궐에서 태어났고[生], 상균(商均)은 우(虞)의 집에서 태어났다. 당·우 시대에는 집집마다 봉할 만하였으니, 그들과 접한 이들은 반드시 선한 이가 많았을 것이다. 두 임금의 곁에는 반드시 현인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단주는 오만하고 상균은 포학하여 둘 다 제왕의 대통을 잃고 대대로 경계가 되었다. 또 맹자는 사람의 눈동자로 상을 보았으니, 마음이 맑으면 눈동자가 밝고 마음이 흐리면 눈동자가 [흐리다]고 하였다. 사람은 태어날 때 눈이 곧 밝은데, 밝음은 하늘에서 받는 것이어서 기운이 같지 않은 것이다. 어릴 때에는 밝다가 자라서 사람과 접하면서 비로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성은 본디 자연이어서 선악에 바탕이 있다. 맹자가 정과 성을 말한 것은 실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성선의 논의에도 말미암은 바가 있다.
或仁或義,性朮乖也。動作趨翔,性識詭也。面色或白或黑,身形或長或短,至老極死,不可變易,天性然也。皆知水土物器形性不同,而莫知善惡稟之異也。一歲嬰兒無爭奪之心,長大之後,或漸利色,狂心悖行,由此生也。告子與孟子同時,其論性無善惡之分,譬之湍水,決之東則東,決之西則西,夫水無分於東西,猶人無分於善惡也。
혹은 어질고 혹은 의로운 것은 성의 기술[性術]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달리고 나는 것은 성의 식별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빛이 혹은 희고 혹은 검으며, 몸이 혹은 길고 혹은 짧은 것이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바꿀 수 없는 것은 천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모두 물·흙·사물·그릇의 형체와 성질이 같지 않음은 알면서도, 선악을 받은 것이 다름은 알지 못한다. 한 살 된 갓난아이는 다투어 빼앗는 마음이 없으나, 자란 뒤에는 혹 이익과 색에 점점 [물들어], 미친 마음과 어그러진 행실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 고자(告子)는 맹자와 같은 때 사람인데, 그의 성론은 선악의 구분이 없다는 것으로, 이를 여울물에 비유하여 동쪽으로 터 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 주면 서쪽으로 흐르니, 무릇 물이 동서의 구분이 없는 것은 사람에게 선악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夫告子之言,謂人之性與水同也。以性若水,可以水喻性,猶金之為金,水之為水也。人善因善,惡亦因惡。初稟天然之姿,受純壹之質,故生而兆見,善惡可察。無分於善惡,可推移者,謂中人也,不善不惡,須教成者也。故孔子曰:「中人以上可以語上也,中人以下不可以語上也。」告子之以決水喻者,徒謂中人,不指極善極惡也。孔子曰:「性相近也,習相遠也。」夫中人之性,在所習焉。習善而為善,習惡而為惡也。至於極善極惡,非復在習。故孔子曰:「惟上智與下愚不移。」性有善不善,聖化賢教,不能復移易也。孔子道德之祖,諸子之中最卓者也,而曰「上智下愚不移」,故知告子之言,未得實也。夫告子之言,亦有緣也。《詩》曰:「彼姝之子,何以與之?」其傳曰:「譬猶練絲,染之藍則青,染之朱則赤。」夫決水使之東西,猶染絲令之青赤也。
무릇 고자의 말은 사람의 성이 물과 같다는 것이다. 성이 물과 같다면 물로 성을 비유할 수 있으니, 금이 금이 되고 물이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선하면 선에 말미암고, 악하면 또한 악에 말미암는다. 처음에 천연의 자질을 받고 순일한 바탕을 받으므로 태어나면서 조짐이 드러나 선악을 살필 수 있다. 선악의 구분이 없어 옮겨 갈 수 있는 자는 중인(中人)을 이르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 가르침을 받아 이루어져야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중인 이상은 높은 것을 말해 줄 수 있고, 중인 이하는 높은 것을 말해 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자가 물을 터 주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한갓 중인을 이른 것이지,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악한 자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성은 서로 가깝고, 습(習)은 서로 멀다.」라고 하였다. 무릇 중인의 성은 익히는 바에 달려 있다. 선을 익히면 선하게 되고 악을 익히면 악하게 된다.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악한 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익힘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오직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옮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성에 선과 불선이 있어 성인의 교화와 현인의 가르침으로도 다시 옮겨 바꿀 수 없다. 공자는 도덕의 조종이며 제자(諸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인데, 「상지와 하우는 옮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고자의 말이 실상을 얻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릇 고자의 말에도 말미암은 바가 있다. 『시』에 이르기를 「저 아름다운 사람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하였는데, 그 전(傳)에 이르기를 「비유하자면 누인 실과 같아서 쪽으로 물들이면 푸르고, 주사로 물들이면 붉다.」라고 하였다. 무릇 물을 터서 동서로 흐르게 하는 것은 실을 물들여 푸르고 붉게 하는 것과 같다.
丹朱、商均已染於唐、虞之化矣,然而丹朱傲而商均虐者,至惡之質,不受藍朱變也。 孫卿有反孟子,作《性惡》之篇,以為人性惡,其善者偽也。性惡者,以為人生皆得惡性也。偽者,長大之後,勉使為善也。若孫卿之言,人幼小無有善也。稷為兒,以種樹為戲;孔子能行,以俎豆為弄。石生而堅,蘭生而香。稟善氣,長大就成,故種樹之戲為唐司馬,俎豆之弄為周聖師。稟蘭石之性,故有堅香之驗。夫孫卿之言,未為得實。然而性惡之言,有緣也。一對嬰兒,無推讓之心,見食,號欲食之;睹好,啼欲玩之。長大之後,禁情割欲,勉勵為善矣。劉子政非之曰:「如此,則天無氣也。陰陽善惡之相當,則人之為善安從生?」
단주와 상균은 이미 당·우의 교화에 물들었는데도 단주가 오만하고 상균이 포학한 것은, 지극히 악한 바탕이어서 쪽과 주사의 변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손경(孫卿)은 맹자에 반대하여 「성악(性惡)」 편을 지어, 인성은 악하며 그 선한 것은 인위[僞]라고 여겼다. 성이 악하다는 것은 사람은 태어나면서 모두 악한 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인위라는 것은 자란 뒤에 힘써 선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손경의 말대로라면 사람은 어릴 때 선함이 없다. [그러나] 후직(后稷)은 아이였을 때 나무 심기를 놀이로 삼았고, 공자는 걸을 수 있게 되자 제기[俎豆]를 가지고 놀았다. 돌은 나면서부터 단단하고 난초는 나면서부터 향기롭다. 선한 기운을 받아 자라서 이루어지므로, 나무 심기 놀이를 하던 이는 당(唐)의 사마가 되었고, 제기를 가지고 놀던 이는 주(周)의 성스러운 스승이 되었다. 난초와 돌의 성을 받았으므로 단단하고 향기로운 징험이 있는 것이다. 무릇 손경의 말은 실상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악의 말에도 말미암은 바가 있다. 한 쌍의 갓난아이는 미루어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 먹을 것을 보면 부르짖으며 먹고자 하고, 좋은 것을 보면 울며 가지고 놀고자 한다. 자란 뒤에는 정을 금하고 욕심을 끊어 힘써 선을 행한다. 유자정(劉子政)이 이를 비판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하늘에는 기운이 없는 것이다. 음양과 선악이 서로 대등하다면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은 어디에서 생기겠는가?」라고 하였다.
陸賈曰:「天地生人也,以禮義之性。人能察己所以受命則順,順之謂道。」 夫陸賈知人禮義為性,人亦能察所以受命。性善者,不待察而自善;性惡者,雖能察之,猶背禮畔義,義挹於善不能為也。故貪者能言廉,亂者能言治。盜蹠非人之竊也,庄刺人之濫也,明能察己,口能論賢,性惡不為,何益於善?陸賈之言未能得實。
육가(陸賈)가 말하기를 "천지가 사람을 낳을 때 예의(禮義)의 성(性)으로써 한다. 사람이 자기가 명(命)을 받은 까닭을 살필 수 있으면 순(順)하고, 순한 것을 도(道)라 한다."라고 하였다. 육가는 사람이 예의를 성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또한 명을 받은 까닭을 살필 수 있다고 알았다. 성이 선한 자는 살피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선하고, 성이 악한 자는 비록 그것을 살필 수 있더라도 여전히 예를 등지고 의를 배반하니, 의로써 선으로 이끌어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탐욕스러운 자도 청렴을 말할 수 있고, 어지러운 자도 다스림을 말할 수 있다. 도척(盜蹠)은 남의 도둑질을 비난하고 장교(庄蹻)는 남의 방종을 꾸짖으니, 밝음은 자기를 살필 수 있고 입은 현명함을 논할 수 있으나 성이 악하여 행하지 않으니 선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육가의 말은 실상을 얻지 못하였다.
董仲舒覽孫、孟之書,作情性之說曰:「天之大經,一陰一陽。人之大經,一情一性。性生於陽,情生於陰。陰氣鄙,陽氣仁。曰性善者,是見其陽也。謂惡者,是見其陰者也。」若仲舒之言,謂孟子見其陽,孫卿見其陰也。處二家各有見,可也。不處人情性,情性有善有惡,未也。夫人情性同生於陰陽,其生於陰陽,有渥有泊。玉生於石,有純有駁,性情〔生〕於陰陽,安能純善?仲舒之言,未能得實。
동중서(董仲舒)가 손경(孫卿)·맹자(孟子)의 책을 보고 정성(情性)의 설을 지어 말하기를 "하늘의 큰 법(大經)은 한 번 음(陰)하고 한 번 양(陽)하는 것이다. 사람의 큰 법은 한 번 정(情)이고 한 번 성(性)이다. 성은 양에서 생기고 정은 음에서 생긴다. 음기는 비루하고 양기는 어질다. 성이 선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양을 본 것이다. 악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음을 본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서의 말대로라면 맹자는 그 양을 보았고 손경은 그 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두 학파가 각기 본 바가 있다고 판정한 것은 옳다. 사람의 정성을 판정하지 않았으니, 정성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으므로 미진하다. 무릇 사람의 정과 성은 함께 음양에서 생기는데, 음양에서 생기는 것에는 두터움과 엷음이 있다. 옥은 돌에서 생기지만 순수한 것도 있고 섞인 것도 있으니, 성정이 음양에서 [생기는데] 어찌 순전히 선할 수 있겠는가? 중서의 말은 실상을 얻지 못하였다.
劉子政曰:「性,生而然者也,在於身而不發。情,接於物而然者也,出形於外。形外則謂之陽,不發者則謂之陰。」夫子政之言,謂性在身而不發。情接於物,形出於外,故謂之陽;性不發,不與物接,故謂之陰。夫如子政之言,乃謂情為陽、性為陰也;不據本所生起,苟以形出與不發見定陰陽也。必以形出為陽,性亦與物接,造此必於是,顛沛必於是。惻隱,不忍;不忍,仁之氣也。卑歉辭讓,性之發也。有與接會,故惻隱卑謙,形出於外。謂性在內不與物接,恐非其實。不論性之善惡,徒議外內陰陽,理難以知。且從子政之言,以性為陰,情為陽,夫人稟情,竟有善惡不也?
유자정(劉子政)이 말하기를 "성은 태어나면서 그러한 것으로, 몸에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는다. 정은 사물과 접하여 그러한 것으로, 밖으로 형체를 드러낸다. 밖으로 드러나면 양이라 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음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자정의 말은 성이 몸에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정은 사물과 접하여 형체가 밖으로 나오므로 양이라 하고, 성은 드러나지 않고 사물과 접하지 않으므로 음이라 한 것이다. 자정의 말대로라면 곧 정을 양으로, 성을 음으로 여기는 것이니, 본래 생겨난 근원에 의거하지 않고 구차하게 형체가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으로 음양을 정한 것이다. 반드시 형체가 드러나는 것을 양이라 한다면 성 또한 사물과 접하니, 다급할 때에도 반드시 여기에 있고, 넘어질 때에도 반드시 여기에 있다. 측은(惻隱)은 차마 하지 못함이고, 차마 하지 못함은 인(仁)의 기운이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며 사양하는 것은 성이 드러난 것이다. 접하여 만나는 것이 있으므로 측은과 낮추고 겸손함이 밖으로 형체를 드러낸다. 성이 안에 있어 사물과 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마 그 실상이 아닐 것이다. 성의 선악을 논하지 않고 한갓 안팎과 음양만 논하니, 이치를 알기 어렵다. 또 자정의 말을 따라 성을 음으로, 정을 양으로 삼는다면, 사람이 품부받은 정에는 끝내 선악이 있는가 없는가?
自孟子以下至劉子政,鴻儒博生,聞見多矣。然而論情性,竟無定是。唯世碩、公孫尼子之徒,頗得其正。由此言之,事易知,道難論也。酆文茂記,繁如榮華,恢諧劇談,甘如飴蜜,未必得實。實者,人性有善有惡,猶人才有高有下也。高不可下,下不可高。謂性無善惡,是謂人才無高下也。稟性受命,同一實也。命有貴賤,性有善惡。謂性無善惡,是謂人命無貴賤也。
맹자로부터 아래로 유자정에 이르기까지 큰 학자와 박식한 선비들은 듣고 본 것이 많았다. 그러나 정성을 논한 것은 끝내 정해진 옳음이 없다. 오직 세석(世碩)(儒)·공손니자(公孫尼子)의 무리만이 자못 그 바름을 얻었다. 이로써 말하면, 일은 알기 쉬우나 도는 논하기 어렵다. 풍부한 문장과 무성한 기록은 번성하기가 꽃과 같고, 익살과 거침없는 담론은 달기가 엿과 꿀 같으나, 반드시 실상을 얻은 것은 아니다. 실상은, 사람의 성에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사람의 재주에 높음도 있고 낮음도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높은 것은 낮게 할 수 없고, 낮은 것은 높게 할 수 없다. 성에 선악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재주에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성을 품부받는 것과 명을 받는 것은 똑같은 하나의 실상이다. 명에는 귀천이 있고 성에는 선악이 있다. 성에 선악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명에 귀천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九州田土之性,善惡不均。故有黃赤黑之別,上中下之差。水潦不同,故有清濁之流,東西南北之趨。人稟天地之性,懷五常之氣,或仁或義,性朮乖也;動作趨翔,或重或輕,性識詭也;面色或白或黑,身形或長或短,至老極死不可變易,天性然也。余固以孟軻言人性善者,中人以上者也;孫卿言人性惡者,中人以下者也;揚雄言人性善惡混者,中人也。若反經合道,則可以為教;盡性之理,則未也。
구주(九州) 전토(田土)의 성질은 좋고 나쁨이 고르지 않다. 그러므로 황색·적색·흑색의 구별과 상·중·하의 차등이 있다. 물과 큰물이 같지 않으므로 맑고 흐린 흐름과 동서남북으로 향하는 방향이 있다. 사람은 천지의 성을 품부받고 오상(五常)의 기를 품어, 어떤 이는 인(仁)하고 어떤 이는 의(義)하니 성술(性術)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행동하며 나아가고 날아오름에 어떤 이는 무겁고 어떤 이는 가벼우니 성식(性識)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빛이 어떤 이는 희고 어떤 이는 검으며, 몸의 형체가 어떤 이는 길고 어떤 이는 짧아,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바꿀 수 없으니 천성이 그러한 것이다. 나는 본래 맹가(孟軻)가 사람의 성이 선하다고 말한 것은 중인(中人) 이상이고, 손경이 사람의 성이 악하다고 말한 것은 중인 이하이며, 양웅(揚雄)이 사람의 성이 선악이 섞였다고 말한 것은 중인이라고 여긴다. 경(經)에 반하되 도에 합하는 것이라면 가르침으로 삼을 수 있으나, 성의 이치를 다한 것으로는 아직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