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曰命難知。命甚易知。知之何用?用之骨體。人命稟於天,則有表候以知體。察表候以知命,猶察斗斛以知容矣。表候者,骨法之謂也。傳言黃帝龍顏,顓頊戴午,帝嚳駢齒,堯眉八采,舜目重瞳,禹耳三漏,湯臂再肘,文王四乳,武王望陽,周公背僂,皋陶馬口,孔子反羽。斯十二聖者,皆在帝王之位,或輔主憂世,世所共聞,儒所共說,在經傳者較著可信。若夫短書俗記、竹帛胤文,非儒者所見,眾多非一。蒼頡四目,為黃帝史。晉公子重耳仳脅,為諸侯霸。蘇秦骨鼻,為六國相。張儀仳脅,亦相秦、魏。項羽重瞳,云虞舜之後。與高祖分王天下。
사람들은 명은 알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명은 매우 알기 쉽다. 무엇으로 아는가? 골체(骨體)로써 한다. 사람의 명은 하늘에서 받으니, 곧 겉으로 드러난 징후가 있어 몸으로 알 수 있다. 겉의 징후를 살펴 명을 아는 것은 말[斗]과 곡(斛)을 살펴 그 용량을 아는 것과 같다. 겉의 징후란 골법(骨法)을 말한다. 전하는 말에 황제(黃帝)는 용의 얼굴이고, 전욱(顓頊)은 [머리에] 오(午) 자 모양을 이었으며, 제곡(帝嚳)은 이가 붙어 있고, 요(堯)는 눈썹이 여덟 빛깔이며, 순(舜)은 눈에 눈동자가 둘이고, 우(禹)는 귀에 구멍이 셋이며, 탕(湯)은 팔에 팔꿈치가 둘이고, 문왕(文王)은 젖이 넷이며, 무왕(武王)은 눈이 위를 바라보고, 주공(周公)은 등이 굽었으며, 고요(皋陶)는 말의 입이고, 공자(孔子)는 [정수리가] 오목하였다[反羽]고 한다. 이 열두 성인은 모두 제왕의 지위에 있었거나 혹은 임금을 보좌하며 세상을 근심한 이들로서, 세상이 함께 듣고 유자(儒者)들이 함께 말하며, 경전(經傳)에 실린 것은 비교적 뚜렷하여 믿을 만하다. 짧은 책이나 속된 기록, 죽간과 비단에 이어 적힌 글로서 유자들이 보지 못한 것들은 많아 하나가 아니다. 창힐(蒼頡)은 눈이 넷이었고 황제의 사관이 되었다. 진(晉) 공자 중이(重耳)는 갈비뼈가 통뼈였고[騈脅] 제후의 패자가 되었다. 소진(蘇秦)은 코에 뼈가 [솟아] 있었고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장의(張儀)는 갈비뼈가 통뼈였고 역시 진(秦)과 위(魏)의 재상이 되었다. 항우(項羽)는 눈동자가 둘이어서 우순(虞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고조와 천하를 나누어 왕이 되었다.
陳平貧而飲食之足,貌體佼好,而眾人怪之,曰:「平何食而肥?」及韓信為滕公所鑒,免於質,亦以面狀有異。面狀肥佼,亦一相也。高祖隆准、龍顏、美須,左股有七十二黑子。單父呂公善相,見高祖狀貌,奇之,因以其女妻高祖,呂后是也,卒生孝惠〔帝〕、魯元公主。高祖為泗上亭長,當去歸之田,與呂后及兩子居田。有一老公過,請飲,因相呂后曰:「夫人,天下貴人也。」令相兩子,見孝惠曰:「夫人所以貴者,乃此男也。」相魯元,曰:「皆貴。」老公去,高祖從外來,呂后言於高祖。高祖追及老公,止使自相。老公曰:「鄉者夫人嬰兒相皆似君,君相不可言也。」後高祖得天下,如老公言。推此以況,一室之人,皆有富貴之相矣。
진평(陳平)은 가난하였으나 먹고 마시는 것이 넉넉한 듯 용모와 몸이 훤하고 좋았으므로, 뭇사람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평은 무엇을 먹고 살쪘는가?」라고 하였다. 한신(韓信)이 등공(滕公)에게 눈에 띄어 형벌[質]을 면한 것도 얼굴 모양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얼굴 모양이 살지고 훤한 것도 하나의 상(相)이다. 고조는 코가 높고 용의 얼굴이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왼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일흔두 개 있었다. 선보(單父)의 여공(呂公)이 관상을 잘 보았는데, 고조의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 딸을 고조에게 아내로 주었으니, 여후(呂后)가 그이다. 마침내 효혜제(孝惠帝)[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았다. 고조가 사수(泗水) 가의 정장(亭長)이었을 때 휴가를 얻어 밭으로 돌아가, 여후와 두 자녀와 함께 밭에 있었다. 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마실 것을 청하고는 여후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부인은 천하의 귀인입니다.」라고 하였다. 두 자녀의 상을 보게 하니, 효혜를 보고 말하기를 「부인이 귀하게 되는 까닭은 바로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노원의 상을 보고 「모두 귀합니다.」라고 하였다. 노인이 떠나고 고조가 밖에서 오자 여후가 고조에게 말하였다. 고조가 노인을 뒤쫓아 가서 멈추게 하고 자신의 상을 보게 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아까 부인과 아이들의 상이 모두 그대를 닮았는데, 그대의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고조가 천하를 얻으니 노인의 말과 같았다. 이를 미루어 견주어 보면, 한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부귀의 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類同氣鈞,性體法相固自相似。異氣殊類,亦兩相遇。富貴之男娶得富貴之妻,女亦得富貴之男。夫二相不鈞而相遇,則有立死;若未相適,有豫亡之禍也。 王莽姑正君許嫁,至期當行時,夫輒死。如此者再,乃獻之趙王,趙王未取,又薨。清河南宮大有與正君父稚君善者遇,相君曰:「貴為天下母。」是時,宣帝世,元帝為太子,稚君乃因魏郡都尉納之太子,太子幸之,生子君上。宣帝崩,太子立,正君為皇后,君上為太子。元帝崩,太子立,是為成帝,正君為皇太后,竟為天下母,夫正君之相當為天下母,而前所許二家及趙王為無天下父之相,故未行而二夫死,趙王薨。是則二夫、趙王無帝王大命,而正君不當與三家相遇之驗也。丞相黃次公故為陽夏游徼,與善相者同車俱行,見一婦人年十七八,相者指之曰:「此婦人當大富貴,為封侯者夫人。」次公止車,審視之,相者曰:「今此婦人不富貴,卜書不用也。」次公問之,乃其旁里人巫家子也,即娶以為妻。其後,次公果大富貴,位至丞相,封為列侯。夫次公富貴,婦人當配之,故果相遇,遂俱富貴。使次公命賤,不得婦人為偶,不宜為夫婦之時,則有二夫、趙王之禍。夫舉家皆富貴之命,然後乃任富貴之事。骨法形體,有不應者,擇必別離死亡,不得久享介福。故富貴之家,役使奴僮,育養牛馬,必有與眾不同者矣。僮奴則有不死亡之相,牛馬則有數字乳之性,田則有種孽速熟之谷,商則有居善疾售之貨。是故知命之人,見富貴於貧賤,睹貧賤於富貴。
부류가 같고 기운이 고르면 성품·몸·법상(法相)이 본디 저절로 서로 비슷하다. 기운이 다르고 부류가 다르면 또한 둘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부귀한 남자는 부귀한 아내를 얻고, 여자 역시 부귀한 남자를 얻는다. 무릇 두 상이 고르지 않은데 서로 만나면 곧 즉사하는 일이 있고, 아직 서로 맞아들이지 않았더라도 미리 죽는 화가 있다. 왕망의 고모 정군은 시집가기로 허락되어 기일에 이르러 가려 할 때마다 남편이 곧 죽었다. 이렇게 두 번 하자 이에 조왕(趙王)에게 바쳤는데, 조왕이 아직 맞아들이기 전에 또 죽었다. 청하(淸河)의 남궁대유(南宮大有)가 정군의 아버지 치군(稚君)과 친한 사이로 만났는데, [정군의] 상을 보고 치군에게 말하기를 「귀하기가 천하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는 선제(宣帝)의 치세로 원제(元帝)가 태자였는데, 치군이 이에 위군도위(魏郡都尉)를 통하여 [정군을] 태자에게 들이니, 태자가 그를 총애하여 아들 군상(君上)을 낳았다. 선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자 정군은 황후가 되고 군상은 태자가 되었다. 원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성제(成帝)이고, 정군은 황태후가 되어 마침내 천하의 어머니가 되었다. 무릇 정군의 상은 마땅히 천하의 어머니가 될 것이었는데, 앞서 허혼한 두 집안과 조왕은 천하의 아버지가 될 상이 없었으므로, 아직 시집가기 전에 두 남편이 죽고 조왕이 죽은 것이다. 이는 두 남편과 조왕에게 제왕의 큰 명이 없고, 정군이 세 집안과 서로 만나서는 안 되었다는 징험이다. 승상 황차공은 전에 양하(陽夏)의 유요(游徼)였는데, 관상을 잘 보는 자와 수레를 함께 타고 가다가 나이 열일고여덟 된 한 부인을 보았다. 관상가가 그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부인은 마땅히 크게 부귀하여 후(侯)에 봉해질 자의 부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차공이 수레를 멈추고 자세히 보니, 관상가가 말하기를 「지금 이 부인이 부귀하지 않다면 점서(卜書)는 쓸모가 없다.」라고 하였다. 차공이 물어보니 곧 이웃 마을 사람 무당 집의 딸이었으므로 곧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 그 뒤 차공은 과연 크게 부귀해져 지위가 승상에 이르고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무릇 차공이 부귀할 것이었으므로 부인이 마땅히 그의 짝이 되었고, 그러므로 과연 서로 만나 마침내 함께 부귀해진 것이다. 만약 차공의 명이 천하였다면 그 부인을 짝으로 얻지 못하였을 것이고, 부부가 되어서는 안 될 때라면 두 남편과 조왕의 화가 있었을 것이다. 무릇 온 집안이 모두 부귀의 명을 가진 뒤에야 부귀의 일을 감당한다. 골법과 형체에 응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이별하거나 죽게 되어 오래도록 큰 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귀한 집에서 부리는 노복과 기르는 소와 말은 반드시 뭇 [집안의 것과] 다른 점이 있다. 노복은 죽거나 달아나지 않는 상이 있고, 소와 말은 새끼를 자주 낳는 성질이 있으며, 밭에는 싹이 나 빨리 익는 곡식이 있고, 장사에는 쌓아 두면 좋고 빨리 팔리는 재화가 있다. 이 때문에 명을 아는 사람은 빈천한 가운데서 부귀를 보고, 부귀한 가운데서 빈천을 본다.
案骨節之法,察皮膚之理,以審人之性命,無不應者。趙簡子使姑布子卿相諸子,莫吉,至翟婢之子無恤,而以為貴。無恤最賢,又有貴相,簡子後廢太子而立無恤,卒為諸侯,襄子是矣。相工相黥布當先刑而乃王,後竟被刑乃封王。衛青父鄭季與楊信公主家僮衛媼通,生青,在建章宮時,鉗徒相之,曰:「貴至封侯。」青曰:「人奴之道,得不笞罵足矣!安敢望封侯?」其後青為軍吏,戰數有功,超封增官,遂為大將軍,封為萬戶侯。周亞夫未封侯之時,許負相之,曰:「君後三歲而入將相,持國秉,貴重矣,於人臣無兩。其後九歲而君餓死。」亞夫笑曰:「臣之兄已代侯矣,有如父卒子當代,亞夫何說侯乎?然既巳貴,如負言,又何說餓死?指示我!」許負指其口,有縱理入口,曰:「此餓死法也。」居三歲,其兄絳侯勝有罪,文帝擇絳侯子賢者,推亞夫,乃封條侯,續絳侯後。文帝之後六年,匈奴入邊,乃以亞夫為將軍。至景帝之時,亞夫為丞相,後以疾免。其子為亞夫買工官尚方甲盾五百被可以為葬者,取庸苦之,不與錢。庸知其盜買官器,怨而上告其子。景帝下吏責問,因之食五日,嘔血而死。當鄧通之幸文帝也,貴在公卿之上,賞賜億萬,與上齊體。相工相之曰:「當貧賤餓死。」
골절(骨節)의 법을 살피고 피부의 결을 살펴서 사람의 성(性)과 명(命)을 헤아리면 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조간자가 고포자경(姑布子卿)으로 하여금 여러 아들의 상을 보게 하였는데 길한 자가 없었고, 적(翟) 출신 여종의 아들 무휼에 이르러서 귀하다고 하였다. 무휼이 가장 어질고 또 귀한 상이 있었으므로, 간자는 뒤에 태자를 폐하고 무휼을 세웠고 마침내 제후가 되었으니 양자(襄子)가 그이다. 관상쟁이가 경포(黥布)의 상을 보고 먼저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뒤에 과연 형벌을 받고 왕에 봉해졌다. 위청(衛靑)의 아버지 정계(鄭季)가 양신공주(楊信公主) 집안의 종 위온(衛媼)과 사통하여 위청을 낳았다. [위청이] 건장궁(建章宮)에 있을 때 쇠사슬을 찬 죄수가 그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귀하여 후(侯)에 봉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청이 말하기를 「남의 종으로서는 매 맞고 욕먹지 않으면 족하다! 어찌 감히 후에 봉해지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뒤 위청은 군리(軍吏)가 되어 싸움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워 등급을 뛰어넘어 봉해지고 관직이 더해져 마침내 대장군이 되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졌다. 주아부(周亞夫)가 아직 후에 봉해지기 전에 허부(許負)가 그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3년 뒤에 장상(將相)의 반열에 들어 나라의 권병을 잡아 귀하고 무거워져 신하 가운데 둘도 없을 것이다. 그 뒤 9년이 지나 그대는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부가 웃으며 말하기를 「신의 형이 이미 [아버지를] 대신하여 후가 되었으니, 만일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대신해야 한다면 아부가 어찌 후를 말하겠는가? 그러나 이미 귀해진다면 허부의 말대로 또 어찌 굶어 죽는다고 하는가? 나에게 가리켜 보여 달라!」라고 하였다. 허부가 그의 입을 가리키니 세로 주름이 입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말하기를 「이것이 굶어 죽는 상법(相法)이다.」라고 하였다. 3년이 지나 그의 형 강후(絳侯) 승(勝)이 죄를 지으니, 문제(文帝)가 강후의 아들 가운데 어진 자를 가려 아부를 추천받아 이에 조후(條侯)에 봉하여 강후의 뒤를 잇게 하였다. 문제 후(後) 6년에 흉노가 변경에 들어오자 이에 아부를 장군으로 삼았다.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 아부는 승상이 되었다가 뒤에 병으로 면직되었다. 그의 아들이 아부를 위하여 공관(工官) 상방(尙方)의 갑옷과 방패 오백 벌을 장례에 쓸 수 있는 것으로 샀는데, 품팔이꾼을 고되게 부리고 돈을 주지 않았다. 품팔이꾼이 그가 관의 기물을 몰래 산 것을 알고 원망하여 그 아들을 위에 고발하였다. 경제가 옥리에게 넘겨 문책하게 하였는데, [아부는] 이로 인하여 닷새 동안 먹지 않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등통(鄧通)이 문제에게 총애를 받았을 때 귀하기가 공경(公卿)보다 위에 있었고 상으로 받은 것이 억만이어서 임금과 대등하였다. 관상쟁이가 그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마땅히 빈천하여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文帝崩,景帝立,通有盜鑄錢之罪,景帝考驗,通亡,寄死人家,之名一錢。韓太傅為諸生時,借相工五十錢,與之俱入璧雍之中,相璧雍弟子誰當貴者。相工指倪寬曰:「彼生當貴,秩至三公。」韓生謝遣相工,通刺倪寬,結膠漆之交,盡筋力之敬,徙舍從寬,深自附納之。寬嘗甚病,韓生養視如仆狀,恩深逾於骨肉。後名聞於天下。倪寬位至御史大夫,州郡丞旨召請,擢用舉在本朝,遂至太傅。夫鉗徒、許負及相鄧通、倪寬之工,可謂知命之工矣。故知命之工,察骨體之証,睹富貴貧賤,猶人見盤盂之器,知所設用也。善器必用貴人,惡器必施賤者;尊鼎不在陪廁之側,匏瓜不在殿堂之上,明矣。富貴之骨,不遇貧賤之苦;貧賤之相,不遭富貴之樂,亦猶此也。器之盛物,有斗石之量,猶人爵有高下之差也。器過其量,物溢棄遺;爵過其差,死亡不存。論命者如比之於器,以察骨體之法,則命在於身形定矣。
문제가 붕어하고 경제가 즉위하자, 등통은 몰래 돈을 주조한 죄가 있어 경제가 조사하게 하니, 등통은 달아나 남의 집에 붙어살다가 죽었는데, 이름으로 된 돈 한 푼도 [없었다]. 한태부(韓太傅)가 제생(諸生)이었을 때 관상쟁이에게 50전을 빌려 주고 그와 함께 벽옹(璧雍) 안에 들어가, 벽옹의 제자 가운데 누가 귀하게 될지 상을 보게 하였다. 관상쟁이가 예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평생 마땅히 귀하여 품계가 삼공(三公)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생은 관상쟁이에게 사례하여 보내고, 예관에게 명함을 통하여 아교와 옻칠 같은 교분을 맺고 힘을 다해 공경하였으며, 거처를 옮겨 예관을 따르며 깊이 스스로 그에게 붙었다. 예관이 일찍이 몹시 앓았을 때 한생은 종처럼 보살펴 은혜의 깊음이 골육보다 더하였다. 뒤에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예관은 지위가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는데, 주군(州郡)이 그 뜻을 받들어 [한생을] 불러 청하고 발탁하여 조정에 천거하니 마침내 태부에 이르렀다. 무릇 쇠사슬 찬 죄수와 허부, 그리고 등통과 예관의 상을 본 관상쟁이는 명을 아는 관상쟁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명을 아는 관상쟁이가 골체의 증거를 살펴 부귀빈천을 보는 것은, 사람이 쟁반과 사발 같은 그릇을 보고 그 쓰일 바를 아는 것과 같다. 좋은 그릇은 반드시 귀한 사람에게 쓰이고 나쁜 그릇은 반드시 천한 자에게 베풀어지니, 존귀한 솥은 뒷간 곁에 있지 않고 박[匏瓜]은 전당 위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부귀한 뼈가 빈천의 괴로움을 만나지 않고 빈천한 상이 부귀의 즐거움을 만나지 않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릇이 물건을 담는 데에 말[斗]과 섬[石]의 용량이 있는 것은 사람의 작위에 높고 낮은 차등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릇이 그 용량을 넘으면 물건이 넘쳐 버려지고, 작위가 그 차등을 넘으면 죽어 남아 있지 못한다. 명을 논하는 자가 만약 그릇에 견주어 골체의 법을 살핀다면, 명이 몸의 형체에 정해져 있음을 [알 것이다].
非徒富貴貧賤有骨體也,而操行清濁亦有法理。貴賤貧富,命也。操行清濁,性也。非徒命有骨法,性亦有骨法。唯知命有明相,莫知性有骨法,此見命之表証,不見性之符驗也。范蠡去越,自齊遺大夫種書曰:「飛鳥盡,良弓藏,狡兔死,走犬烹。越王為人長頸鳥喙,可與共患難,不可與共容樂。子何不去?」大夫種不能去,稱病不朝,賜劍而死。大梁人尉繚說秦始皇以并天下之計,始皇從其冊,與人亢禮,衣服飲食與之齊同。繚曰:「秦王為人,隆准長目,鷙膺豺聲,少恩,虎視狼心,居約易以下人,得志亦輕視人。我布衣也,然見我,常身自下我。誠使秦王須得志天下,皆為虜矣。不可與交游。」乃亡去。故范蠡、尉繚見性行之証,而以定處來事之實,實有其效,如其法相。
부귀빈천에만 골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행(操行)의 청탁(淸濁)에도 법리(法理)가 있다. 귀천과 빈부는 명(命)이고, 조행의 청탁은 성(性)이다. 명에만 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에도 골법이 있다. 명에 분명한 상이 있는 줄만 알고 성에 골법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니, 이는 명의 겉 증거만 보고 성의 부험(符驗)은 보지 못한 것이다. 범려(范蠡)가 월(越)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에서 대부 종(種)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나는 새가 다하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긴다. 월왕은 사람됨이 목이 길고 새의 부리 같아서 환난은 함께할 수 있어도 안락은 함께할 수 없다. 그대는 어찌 떠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대부 종은 떠나지 못하고 병을 칭하여 조회하지 않다가 칼을 하사받아 죽었다. 대량(大梁) 사람 위료(尉繚)가 진시황(秦始皇)에게 천하를 아우를 계책을 유세하자, 시황이 그 계책을 따르고 그와 대등한 예로 대하며 의복과 음식을 그와 똑같이 하였다. 위료가 말하기를 「진왕은 사람됨이 코가 높고 눈이 길며, 매의 가슴에 승냥이 소리를 내고, 은혜가 적으며 범의 눈에 이리의 마음을 지녀, 곤궁할 때는 쉽게 남에게 몸을 낮추지만 뜻을 얻으면 또한 남을 가볍게 여긴다. 나는 포의(布衣)인데도 나를 만나면 늘 몸소 나에게 낮춘다. 참으로 진왕이 천하에서 뜻을 얻는다면 [천하 사람이] 모두 포로가 될 것이다. 함께 사귈 수 없다.」라고 하고 이에 달아났다. 그러므로 범려와 위료는 성품과 행실의 증거를 보고 앞으로 올 일의 실상을 정하였는데, 실제로 그 효험이 있어 그 법상(法相)과 같았다.
由此言之,性命繫於形體明矣。以尺書所載,世所共見,准況古今,不聞者必眾多非一,皆有其實。 稟氣於天,立形於地,察在地之形,以知在天之命,莫不得其實也。有傳孔子相澹台子羽,唐舉占蔡澤不驗之文,此失之不審,何隱匿微妙之表也? 相或在內,或在外,或在形體,或在聲氣,察外者遺其內,在形體者亡其聲氣。孔子適鄭,與弟子相失,孔子獨立鄭東門。鄭人或問子貢曰:「東門有人,其頭似堯,其項若皋陶,肩類子產。然自腰以下,不及禹三寸,若喪家之狗。」子貢以告孔子,孔子欣然笑曰:「形狀未也。如喪家狗,然哉!然哉!」夫孔子之相,鄭人失其實。鄭人不明,法術淺也。孔子之失子羽,唐舉惑於蔡澤,猶鄭人相孔子,不能具見形狀之實也。以貌取人,失於子羽;以言取人,失於宰予也。
이로써 말하면, 성과 명이 형체에 매여 있음이 분명하다. 척서(尺書)에 실려 세상이 함께 보는 것으로 고금을 견주어 보면, 듣지 못한 것도 반드시 많아 하나가 아니며 모두 그 실상이 있을 것이다. 기운을 하늘에서 받고 형체를 땅에서 세우니, 땅에 있는 형체를 살펴 하늘에 있는 명을 알면 그 실상을 얻지 못함이 없다. 공자가 담대자우(澹臺子羽)의 상을 보고, 당거(唐擧)가 채택(蔡澤)을 점친 것이 맞지 않았다는 글이 전하는데, 이는 살핌이 자세하지 못하여 잘못된 것이니, 어찌 [상의] 겉이 숨겨지고 미묘해서이겠는가? 상은 혹 안에 있고 혹 밖에 있으며, 혹 형체에 있고 혹 소리와 기운에 있으니, 밖을 살피는 자는 그 안을 빠뜨리고, 형체에 [주목하는] 자는 소리와 기운을 놓친다. 공자가 정(鄭)나라에 갔다가 제자들과 서로 잃어, 공자가 홀로 정나라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子貢)에게 묻기를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머리는 요(堯)와 닮았고, 그 목은 고요(皋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비슷하다.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禹)에게 세 치 미치지 못하며, 초상집의 개와 같다.」라고 하였다. 자공이 이를 공자에게 알리니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형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초상집의 개와 같다는 것은 그렇다! 그렇다!」라고 하였다. 무릇 공자의 상에 대해 정나라 사람은 그 실상을 잃었다. 정나라 사람이 밝지 못한 것은 [관상의] 법술이 얕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자우를 잘못 본 것과 당거가 채택에게 미혹된 것은,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상을 보면서 형상의 실상을 다 보지 못한 것과 같다. 용모로 사람을 취하다가 자우에게서 잘못하였고, 말로 사람을 취하다가 재여(宰予)에게서 잘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