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거나, 누르거나
넘치는 사주를 다루는 두 처방, 흘려보내기와 눌러 다스리기. 두 실제 명식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느 길을 택할지는 취향이 아니라 판 위에 무엇이 남아 있느냐가 정한다.
한눈에 일간이 넘칠 때 명리는 두 갈래로 처방한다. 흘려보내거나, 눌러 다스리거나. 어느 쪽을 택할지는 취향이 아니다. 판 위에 그 처방을 쓸 글자가 남아 있느냐가 정한다. 두 실제 명식이 정확히 반대편에서 이 대칭을 보여 준다. 규칙을 빠짐없이 밟는 일이라면, 이 층에서는 기계가 사람보다 실수를 덜 한다.
앞 편에서는 약한 일간을 보았다. 이번엔 넘치는 쪽이다.
넘치면 어떻게 하는가. 명리의 대답은 두 갈래다. 흘려보내거나, 눌러 다스리거나. 일간이 낳는 글자로 힘을 빼는 것이 식상(食傷)을 쓰는 길이고, 일간을 극하는 글자로 잡는 것이 관살(官殺)을 쓰는 길이다. 물이 넘치면 물길을 내어 빼거나 둑을 쌓아 막는다. 그 둘이다.
문제는 어느 쪽을 택하느냐다. 그리고 이 선택은 생각보다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눌러 다스린 사주
時 日 月 年
辛 甲 乙 庚
未 寅 卯 子
↑ 일간 甲
봄 묘월(卯月)에 태어난 갑목(甲)이다. 세력을 재면 목이 69.4%. 절반을 훌쩍 넘는다. 일간과 같은 무리인 견겁(肩劫)이 사주의 한복판을 가득 채운 짜임이다.
이런 판을 명리는 양인격(羊刃格)이라 부른다. 힘이 한쪽으로 쏠려 있다. 넘친다.
그러면 빼야 하는가 눌러야 하는가. 판을 보면 답이 이미 정해져 있다. 일간을 빼 줄 식상 화가 드러난 글자로 하나도 없다. 지지 안에만 숨어 있다. 물길을 내려 해도 낼 물길이 없는 것이다.
남은 길은 하나다. 눌러 다스리는 것. 일간을 극하는 관살 금이 마침 둘 있다. 세력으로는 5.4%밖에 되지 않는 옅은 글자들이지만, 옅다고 답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섯 법 가운데 억부와 병약과 통관, 셋이 나란히 금을 짚는다. 그래서 이 사주의 용신은 년간의 경금(庚)이다. 십성으로는 관살이다.
희신은 토다. 시지의 미토(未)가 그 자리다. 토가 금을 낳기 때문이다. 다스리는 글자가 혼자 버티지 않게 뒤에서 받치는 자리다. 다만 한 글자뿐이고, 그 토를 목 무리가 한꺼번에 다투는 자리라 받침이 두터운 것은 아니다.
양인이 무거울 때 관살로 그것을 잡는다. 수백 년 묵은 짜임 그대로다.
흘려보낸 사주
이번엔 정반대 판이다.
時 日 月 年
己 辛 壬 戊
丑 未 戌 辰
↑ 일간 辛
여덟 글자 가운데 여섯이 토다. 세력으로 58.8%. 이 토는 일간 신금(辛)을 낳아 주는 인수(印綬)다. 나를 돕는 글자가 사주의 육 할이다.
돕는 글자가 많으면 좋은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받침이 너무 두터우면 일간이 그 안에 묻힌다. 명리는 이런 자리를 인수태왕(印綬太旺)이라 부른다. 도움이 지나쳐 도리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다.
그러면 눌러야 하는가. 판을 보면 누를 길이 없다. 그 토를 다스릴 재성 목이 없다. 일간을 잡아 줄 관살 화도 없다. 둑을 쌓으려 해도 쌓을 흙이 없는 셈이다.
일간 옆에 딱 한 글자, 월간의 임수(壬)가 떠 있다. 일간이 낳는 글자, 식상이다. 사주에서 일간이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다섯 법 가운데 억부와 병약과 통관, 셋이 나란히 수를 짚는다. 이 사주의 용신은 그 임수다.
무거운 토를 정면에서 누르는 길이 막혀 있으니, 일간이 직접 빠져나가는 길을 낸다. 한 글자가 사주의 짐을 다 진다.
그럼 희신은 무엇인가. 목이다. 용신 임수가 흘러가 닿을 다음 자리다. 그런데 이 사주에는 목이 드러난 글자로 하나도 없다. 지지 안에만 숨어 있다. 쓰는 글자는 찾았는데 반가운 글자가 비어 있는 짜임이다. 임수는 혼자 짐을 진다.
대칭이 말해 주는 것
두 사주를 나란히 놓으면 대칭이 또렷하다.
앞의 사주는 빼는 길이 막혀서 눌렀다. 뒤의 사주는 누르는 길이 막혀서 뺐다. 어느 쪽도 명리가가 기분에 따라 고른 것이 아니다. 판이 이미 선택지를 좁혀 두었고, 규칙은 남은 길을 따라갔을 뿐이다.
여기서 규칙의 층이 무엇인지가 드러난다.
넘치면 뺀다, 넘치면 누른다. 이런 문장은 외우기 쉽다. 어려운 것은 이 판에서 뺄 수 있는지 누를 수 있는지를 빠짐없이 확인하는 일이다. 드러난 글자와 숨은 글자를 갈라 세고, 합으로 묶인 자리와 충으로 흔들리는 자리를 짚고, 그 결과 어느 통로가 살아 있고 어느 통로가 막혔는지를 판정하는 일. 규칙 자체는 몇 줄이지만, 그 몇 줄을 여덟 글자 위에서 남김없이 밟는 데는 품이 든다.
사람은 지친다. 앞의 세 사주가 비슷했다면 네 번째도 비슷하게 보고 만다. 어제 잘 짚은 자리를 오늘 넘기기도 한다. 기계는 그러지 않는다. 천 번을 물어도 같은 자리를 같은 순서로 밟는다. 놓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피로가 아니라 규칙에 애초에 없던 것이고, 없는 것은 밝혀 놓으면 채울 수 있다.
이 층에서 기계가 사람보다 나은 것은 똑똑해서가 아니다. 지치지 않아서다. 나는 이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총명함의 문제로 놓으면 대결이 되고, 피로의 문제로 놓으면 분업이 된다.
그래도 남는 자리
두 사주의 용신이 나왔다. 하나는 누르는 글자, 하나는 빼는 글자.
그런데 이 판정이 알려 주는 것은 처방이지 삶이 아니다. 앞의 사주를 사는 사람은 관살로 눌려 본 사람일 것이다. 규율과 직장과 마감이 그의 삶에 어떤 모양으로 들어왔는지, 그가 그 눌림을 굴레로 받았는지 기강으로 받았는지, 계산은 한 글자도 알려 주지 않는다. 뒤의 사주를 사는 사람은 두터운 도움 속에 묻혀 본 사람일 것이다. 그 도움에 안겨 머물렀는지, 좁은 통로 하나를 뚫고 나갔는지도 마찬가지다.
용신은 문이 어디 있는지 가리킬 뿐이다. 문을 여는 것은 계산이 하는 일이 아니다.
한 줄 요약: 넘치면 빼거나 누른다. 다만 그 처방을 쓸 글자가 판에 남아 있어야 하고, 남아 있는지를 빠짐없이 확인하는 일이라면 기계가 사람보다 실수를 덜 한다.
내 사주는 빼는 자리일까 누르는 자리일까 → 첫 분석 보기
다음 편: 병을 찾아, 눌러서 쓰다. 신약한데도 돕지 않는 판단이 있다. 약은 언제나 병을 겨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