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을 재다
여덟 글자의 힘을 백분율로 재는 일. 글자 하나가 30%를 가져가는 사주를 실제 수치로 펴 보며, 저울의 눈금을 누가 정했는지, 그리고 기계가 땅이 품은 글자까지 센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짚는다.
한눈에 억부는 약한 일간을 돕고 넘치는 일간을 덜어 내는 법이다. 그 앞에는 힘을 재는 저울이 있다. 저울은 글자 수를 세지 않고, 자리와 계절과 땅이 품은 글자까지 함께 단다. 글자 하나가 사주의 30%를 가져가는 일이 그래서 생긴다. 다만 저울의 눈금은 하늘이 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 것이다.
여덟 글자가 놓였다. 이제 판을 읽어야 한다. 명리가 판을 읽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힘을 재는 것이다.
일간이 강한가 약한가. 이 물음이 억부(抑扶)의 출발점이다. 억(抑)은 누르는 것이고 부(扶)는 돕는 것이다. 약하면 돕고 넘치면 덜어 낸다. 말로 하면 이렇게 간단하다. 어려운 것은 강약을 가리는 일이다.
저울은 글자 수를 세지 않는다
실제 명식을 하나 펴 보자.
時 日 月 年
癸 丙 辛 辛
巳 子 卯 丑
↑ 일간 丙
일간은 병화(丙)다. 봄의 한가운데, 묘월(卯月)에 태어났다.
이 사주의 세력을 재면 이렇게 나온다. 수(水) 32.3%, 목(木) 30.3%, 금(金) 19.1%, 화(火) 10.8%, 토(土) 7.5%.
여기서 눈이 걸리는 자리가 있다. 목은 글자가 하나뿐이다. 월지의 묘(卯) 하나. 그런데 세력은 30.3%로 둘째다. 반면 화는 두 글자인데 10.8%밖에 되지 않는다. 글자 수와 무게가 어긋난다.
저울이 글자 수를 세지 않기 때문이다. 저울은 자리를 본다. 월지는 계절을 쥔 자리라 무게가 다르고, 묘는 봄의 한가운데에 놓인 왕지(旺地)라 또 무게가 다르다. 봄 한복판에서 목은 제철을 만난 셈이다. 반대로 이 봄의 화는 아직 데워지지 않았다. 두 글자여도 옅다.
그리고 저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글자까지 단다.
땅이 품은 글자
지지 안에는 천간이 숨어 있다. 정확히는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품고 있다. 이것을 지장간(支藏干)이라 부른다. 자(子) 안에는 수의 천간이 들었고, 축(丑) 안에는 토와 금과 수가 함께 들었다.
명리는 오래전부터 이 세 층을 삼원(三元)이라 불렀다. 천간은 하늘의 층, 지지는 땅의 층, 그리고 땅이 품은 글자는 사람의 층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듯, 드러난 글자와 놓인 자리 사이에 품긴 글자가 있다.
저울은 이 사람의 층까지 올린다. 겉으로 보이는 여덟 글자만이 아니라, 그 글자들이 품고 있는 것까지 백분율에 넣는다. 위의 사주에서 토가 7.5%로 잡히는 것도 축(丑) 하나가 품은 것들 덕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 두고 싶다. 사람의 층이라 불리는 자리까지 기계는 빠짐없이 센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못 세리라 여기면 오해다. 그런데도 응답은 거기에 없다.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겠다.
저울이 가리킨 곳
다시 판으로 돌아온다.
일간 병화는 신약(身弱)이다. 봄의 화가 아직 옅은데, 두 수가 양쪽에서 일간을 누른다. 시간의 계(癸)와 일지의 자(子)다. 게다가 봄 묘월의 기운이 아직 따뜻하지 못해, 사주가 차갑게 식는 쪽으로 기운다. 명리는 이 기울기를 한습(寒濕)이라 부른다. 춥고 습하다는 뜻이다.
약하면 돕는다. 그러면 무엇으로 도울 것인가.
일간을 낳아 주는 글자가 인수(印綬)다. 이 사주에서 일간 병화를 낳는 것은 목이고, 목은 월지 묘 하나다. 마침 그 하나가 30.3%의 무게를 진 왕지의 글자다. 그리고 그 목이 화를 낳으면 사주가 데워진다. 일간을 살리는 길과 사주를 덥히는 길이 같은 글자에서 만난다.
그래서 이 사주의 용신은 월지 묘(卯) 중의 을목(乙木)이다. 십성으로는 인수다.
표기를 눈여겨볼 만하다. 용신은 묘가 아니라 묘 안의 을목이다. 지지가 용신의 자리에 설 때, 실제로 쓰는 것은 그 지지가 품은 천간이다. 앞에서 말한 사람의 층, 지장간이 여기서 다시 나온다. 저울에만 올라가는 층이 아니라, 답 자체가 그 층에서 빠져나온다.
규칙이 짚은 자리와 학습이 짚은 자리가 여기서 겹쳤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판을 본 두 눈이 같은 글자에 닿았다는 뜻이고, 그래서 이 답은 흔들림이 적다.
용신을 돕는 글자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용신 하나를 찾았다고 끝이 아니다.
용신은 혼자 서 있지 않다. 그 용신을 낳아 주거나, 용신이 하려는 일을 거드는 글자가 판 안에 같이 있다. 이를 희신(喜神)이라 부른다. 쓸 용(用)과 반가울 희(喜). 쓰는 글자와 반가운 글자다.
이 사주의 희신은 화다. 일간 병화 자신과 시지의 사화(巳)가 그 자리다.
왜 화인가. 용신인 목이 화를 낳기 때문이다. 묘목이 일간을 살리면, 그 살아난 불이 바로 화다. 용신에서 나에게로 오는 다리가 희신인 셈이다. 용신이 약이라면 희신은 그 약이 몸에 가닿는 길이다.
그래서 기계는 용신 하나만 출력하지 않는다. 다섯 자리를 함께 낸다. 쓰는 글자, 반가운 글자, 꺼리는 글자, 그 꺼리는 것을 키우는 글자, 어느 편도 아닌 글자. 판 위의 여덟 글자가 저마다 어떤 편인지까지 적힌다.
이 다섯 자리가 뒤에서 중요해진다. 규칙과 학습이 서로 다른 글자를 짚는 사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때 한쪽이 짚은 글자가 버려지지 않고 희신의 자리로 살아남는 짜임이 있다. 갈림이 구제된다는 말을, 나중에 이 뜻으로 쓴다.
눈금은 누가 정했나
여기서 이 층의 성질을 말해야 한다.
지난 편의 만세력은 순수한 계산이었다. 약속을 하나 정하면 답이 하나로 결정됐다. 저울은 다르다. 월지에 얼마의 가중을 줄 것인가, 왕지를 얼마나 무겁게 볼 것인가, 품긴 글자를 겉으로 드러난 글자의 몇 할로 칠 것인가. 이 눈금은 하늘이 준 것이 아니다. 사람이 정했고, 유파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러니 저울의 숫자를 신탁처럼 받으면 곤란하다. 30.3%라는 수치는 어느 눈금으로 쟀을 때의 30.3%다. 눈금이 바뀌면 숫자도 바뀐다.
그렇다고 저울이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눈금을 밝히고 재면, 그 안에서 계산은 다시 흔들림이 없다. 사람이 손으로 헤아릴 때 놓치던 자리를 기계는 놓치지 않는다. 지치지도 않고, 어제와 오늘의 판단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계산이되 약속 위의 계산, 이것이 저울의 층이다.
재고 난 뒤에 남는 것
이 명식을 오래 들여다본다. 수치는 다 나왔다. 무엇이 무겁고 무엇이 옅은지, 무엇이 일간을 누르고 무엇이 일간을 살리는지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 사주를 사는 사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차가운 봄에 놓인 옅은 불. 저울은 그 불이 얼마나 옅은지까지 소수점으로 알려 주지만, 그 불이 오늘 무엇을 향해 타는지는 한 글자도 알려 주지 않는다.
저울이 정밀해질수록, 저울에 올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가 도리어 또렷해진다. 나는 요즘 이 사실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좋은 뜻으로 걸린다.
한 줄 요약: 저울은 글자 수가 아니라 자리와 계절과 땅이 품은 글자까지 함께 단다. 다만 그 눈금은 사람이 정한 약속이고, 정직한 계산은 눈금을 밝히고 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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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빼거나, 누르거나. 이번엔 강한 일간이다. 넘치는 힘을 흘려보낼 것인가, 눌러 다스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