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미운 사람 (원진)
잘못한 것도 없는데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 옛사람들은 그 까닭 모를 어긋남에 원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덜어지는 무게가 있다.
한눈에
- 원진이란 · 까닭 없이 서로 꺼려지고 어긋나는 기운의 짝에 붙은 옛 이름. 죄가 아니라 현상의 이름.
- 이름의 위로 · 옛사람들이 이름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흔하고 오래된 일이라는 뜻이다.
- 할 일과 안 할 일 · 미움을 없애려 소모하지 말 것. 다만 미움이 행동이 되지 않게 지킬 것.
- 허락 · 모두와 결이 맞을 수는 없다. 맞지 않는 결 앞에서는 예의로 충분하다.
그 사람이 잘못한 건 없다. 그런데 싫다. 말투가 거슬리고, 웃음소리가 거슬리고, 숨소리마저 거슬리는 날이 있다. 이유를 대 보려 해도 옹색하다. 그리고 이 설명 안 되는 마음이 사람을 이중으로 괴롭힌다. 그 사람이 거슬려서 한 번,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하는 내가 못나 보여서 또 한 번. 이 두 번째 괴로움을 덜어 주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옛사람들도 이 마음을 알았다. 신살 시리즈에서 다룬 원진(元嗔)이 그것이다. 지지의 특정한 짝들이 만나면 까닭 없이 서로 꺼리고 미워하게 된다는 것. 성낼 진 자가 들어 있는 이름부터가,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어긋남을 가리킨다. 부딪히는 까닭이 분명한 충과 달리, 원진은 까닭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크게 싸우지도 않으면서 은근히, 오래, 서로를 불편해하는 사이.
옛사람들이 이 어긋남을 설명하던 방식도 재미있다. 논리가 아니라 이야기였다. 쥐는 양의 머리에 난 뿔을 꺼리고, 소는 말이 밭 갈지 않고 뛰노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호랑이는 닭의 부리를 싫어한다는 식의 민담을 짝마다 붙여 두었다. 그럴듯한 이론을 세우는 대신 동물들의 심사로 풀어 버린 것인데, 나는 이 선택이 오히려 정직해 보인다. 까닭 없는 미움에는 애초에 댈 논리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의 형식 자체가 실토하고 있으니까.
이 이름이 정확한 이론이냐를 따지는 것은 오늘의 관심이 아니다. 신살 시리즈에서 밝혔듯 원진의 근거는 성글고, 이 짝이라서 반드시 미워진다는 법도 없다. 오늘 눈여겨보려는 것은 다른 것이다. 옛사람들이 이 현상에 이름까지 만들어 두었다는 사실 자체다. 이름은 흔한 것에 붙는다. 까닭 없는 미움이 어쩌다 한 사람의 별난 흉이었다면 이름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사람 사이에 늘, 어디서나 있어 온 일이었기에 이름이 생겼다. 그러니 이유 없이 누군가가 미운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흔한 일을 겪는 중이다.
이름이 무게를 덜어 주면, 남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 미움을 없애려고 애쓰지 않는 것. 결이 어긋나는 것은 의지의 일이 아니어서, 미워하지 말자고 다짐할수록 그 사람이 더 크게 보인다. 마음은 마음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빨리 가라앉는다. 둘, 대신 미움이 행동이 되지 않게 지키는 것. 거슬리는 것과 함부로 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 속으로 백 번 거슬려도 겉으로 예의를 지키면, 그 관계는 상하지 않는다. 마음까지 다스리는 것은 성인의 일이고, 행동을 다스리는 것이 어른의 일이다. 우리는 어른이면 된다.
피할 수 없는 자리라면 완충을 설계하는 수밖에 없다. 직장 동료나 가족처럼 매일 봐야 하는 상대라면, 거리는 물리가 아니라 형식으로 만든다. 관계를 일로만 맺고, 예민한 이야기는 말보다 글로 건네고, 단둘의 자리를 굳이 만들지 않는 것. 차갑게 들리겠지만 이것은 냉대가 아니라 관리다. 결이 어긋난 두 사람이 크게 다치지 않고 같은 지붕을 견디는 데는, 뜨거운 화해보다 미지근한 형식이 오래간다.
그리고 하나 더, 상대편의 사정도 같다는 것. 원진은 짝의 이름이라, 내가 까닭 없이 꺼리는 그 사람도 나를 까닭 없이 불편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대칭을 알고 나면 묘하게 마음이 누그러진다. 일방적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결이 어긋난 두 사람이 서로 애쓰고 있는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과 결이 맞는 사람은 없다. 누구의 삶에나 원진의 자리는 있다. 맞지 않는 결 앞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으로 충분하고, 그 이상, 그러니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까지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 요구를 내려놓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조금 덜 거슬리기 시작한다는 것을 아마 알게 될 것이다.
마음까지 다스리는 것은 성인의 일이고, 행동을 다스리는 것이 어른의 일이다. 내 관계의 결 살펴보기 → 첫 분석 보기 다음 편 · 표현하고 싶은 마음, 눌러온 마음 (식상) → 이어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