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점을 지난 것 같은 날들 (쇠)
한창때가 지난 것 같다는 느낌. 십이운성은 제왕 다음에 쇠라는 자리를 두었다. 그런데 이 기울기 시작하는 자리를, 옛사람들은 뜻밖에도 원숙의 자리로 읽었다.
한눈에
- 쇠 · 정점인 제왕 다음, 기운이 처음 기우는 자리. 순환의 자연스러운 다음 걸음.
- 다르게 읽기 · 힘이 빠진 자리가 아니라 힘을 다 써 본 뒤의 노련함이 익는 자리. 원숙의 자리.
- 바뀌는 것 · 밀어붙이는 힘에서 가려 쓰는 힘으로. 양에서 질로.
- 허락 · 전성기의 방식을 놓아도 된다. 그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다음 방식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날들이 있다. 체력이든, 열정이든, 자리든. 한창때는 분명 지나온 것 같은데 다음이 무엇인지는 보이지 않는 시기. 그 느낌을 몰락의 예감으로 듣고 어두워지는 사람에게, 십이운성의 한 자리를 건네고 싶다. 쇠(衰)다.
십이운성에서 기운의 정점은 제왕(帝旺)이다. 가장 왕성하고 가장 뜨거운 자리. 그리고 그 바로 다음이 쇠다. 쇠할 쇠, 기운이 처음으로 기우는 자리다. 이름만 보면 서글프다. 정점 다음이 곧장 기욺이라니. 그런데 십이운성 시리즈에서도 적었듯, 옛사람들은 이 자리를 뜻밖의 눈으로 읽었다. 몰락의 첫 계단이 아니라 원숙의 자리로.
까닭은 이렇다. 쇠는 힘이 없는 자리가 아니라, 힘을 다 부려 본 뒤의 자리다. 제왕을 지나온 기운은 힘의 끝을 안다.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 되는지, 어디에 힘을 쓰고 어디서 아껴야 하는지를 몸으로 안다. 그래서 쇠의 힘은 제왕보다 작지만 낭비가 없다. 밀어붙여 이기던 사람이 이제 안 싸우고 이기는 법을 아는 것. 열 가지를 벌이던 사람이 이제 되는 한 가지를 알아보는 것. 기세는 줄었는데 정확도가 오르는, 이상한 계산이 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옛사람들은 이 자리를 사람의 벼슬살이에 빗대 원로의 자리로 그리기도 했다. 현역의 관을 벗고 한 걸음 물러났지만, 일이 어려울 때 가장 먼저 찾아가 묻는 사람. 손은 놓았어도 눈은 가장 밝은 사람. 힘의 자리에서 눈의 자리로 옮겨 앉은 것이지, 자리를 잃은 것이 아니라는 그림이다. 실제로 어느 분야든 일이 꼬였을 때 불려 나오는 것은 한창 힘 좋은 사람이 아니라 그 일을 오래 겪은 사람이다. 쇠의 값은 그때 드러난다.
그러니 정점을 지났다는 감각을 이렇게 고쳐 들을 수 있다. 내리막이 시작됐다는 뜻이기 전에, 이제 힘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다는 뜻이라고. 전성기의 방식은 전성기의 것이다. 밤을 새우고, 몸으로 때우고, 기세로 밀던 방식. 그 방식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고 내가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방식의 계절이 끝난 것이다. 쇠의 계절에는 쇠의 방식이 있다. 가려 쓰고, 아껴 쓰고, 정확히 쓰는 방식. 양의 시절에서 질의 시절로 옮겨 가는 것이다.
물론 상실감까지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정점의 감각을 아는 사람만이 기욺을 느낀다. 그 서운함은 서운함대로 두어도 된다. 다만 그 서운함이 앞날 전체를 어둡게 칠하게 두지는 말자는 것이다. 십이운성의 순환에서 쇠 다음에도 길은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 길에는 그 길의 열매가 있다.
이 계절에 새로 열리는 재미도 있다. 기르는 재미다. 제 손으로 해내는 맛으로 살던 사람이, 남이 해내도록 곁을 받쳐 주는 맛을 알게 되는 것. 가르치고, 물려주고, 제가 넘어졌던 자리에 미리 등을 밝혀 주는 일. 이 재미는 힘이 넘치는 시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제 것을 이루기에도 바빠서다. 정점을 지나고서야 열리는 문이 있다는 것. 그것도 순환이 공평한 대목이다.
가장 뜨거운 날이 지나야 과일이 단다. 한여름 볕은 과일을 키우지만, 단맛이 드는 것은 볕이 기울기 시작한 뒤다. 기우는 볕 아래서 익는 것들을 생각하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꼭 슬픈 말만은 아니게 된다. 키우는 계절이 끝나고 익는 계절이 온 것뿐이라고. 요즘의 나는 그렇게 읽기로 했다.
그 방식이 안 통하는 것은 내가 끝나서가 아니라 그 방식의 계절이 끝나서다. 나는 지금 어느 계절을 지나고 있을까 → 첫 분석 보기 다음 편 · 힘이 나지 않는 시기 (병) → 이어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