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이 나지 않는 시기 (병)
의욕이 바닥나고 만사가 시들한 시기가 있다. 십이운성의 병은 몸의 진단명이 아니라 기운이 안으로 접히는 국면의 이름이다. 그 시기를 탓하지 않고 지나는 법.
한눈에
- 병이란 · 십이운성에서 쇠 다음의 자리. 기운이 밖으로 뻗기를 멈추고 안으로 접히는 국면.
- 오해 먼저 · 몸의 질병을 예고하는 이름이 아니다. 활동이 잦아드는 시기의 이름일 뿐.
- 접힌 기운의 일 · 밖의 일이 시들해지는 대신 안의 일이 깊어진다. 돌아봄, 헤아림, 사색.
- 허락 · 의욕 없는 자신을 심문하지 않아도 된다. 잦아듦도 순환의 정식 단계다.
게을러진 게 아니라 힘이 안 나는 것이다. 이 둘은 다르다. 게으름은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이고, 힘이 안 나는 것은 하려는데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후자를 겪으면서 전자의 이름으로 자신을 심문한다. 왜 이렇게 늘어졌나, 왜 아무것도 하기 싫나. 그 심문에 지친 사람에게 십이운성의 한 자리를 놓아 본다. 병(病)이다.
이름부터 오해를 걷어 내자. 십이운성의 병은 몸의 질병을 예고하는 자리가 아니다. 십이운성 시리즈에서 적었듯, 이 열두 이름은 기운의 순환을 사람의 한살이에 빗댄 비유다. 태어나고 자라고 왕성하다가 기울고 잦아드는 흐름 속에서, 쇠 다음에 오는 이 자리는 기운이 밖으로 뻗기를 멈추고 안으로 접히는 국면을 가리킨다. 사주에 이 글자가 있다고, 이 운이 온다고 몸이 아프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몸의 일은 몸의 일이라 의원에게 물을 일이고,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운의 국면이다. 이 구분은 이 글에서 이 한 번만 하고 넘어간다.
그러면 기운이 안으로 접힌다는 것은 어떤 시기인가. 바깥일이 시들해지는 시기다. 벌이고 만나고 나서는 일에 흥이 붙지 않는다. 몸이 무겁고, 마음은 자꾸 안쪽을 향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처지는 시기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다른 것도 보았다. 밖으로 나가던 기운이 안으로 접히면, 그 기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안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지나온 것을 돌아보고, 사람의 속을 헤아리고, 겉으로 분주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들여다보는 일. 병의 자리가 예부터 사색과 감수성의 자리로 읽힌 까닭이다. 앓아 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알아보듯, 접혀 본 기운이 깊이를 얻는다.
이 국면에서 곤란해지는 것은 대개, 신호를 무시하고 뻗던 속도로 달릴 때다. 기운이 접히자는데 일정은 왕성하던 때 그대로면, 몸과 마음 어딘가에서 계산이 어긋난다. 억지로 낸 힘은 이자가 붙어 돌아오고, 잦아들 시기를 놓친 잦아듦은 더 길어진다. 계절이 바뀌었는데 여름 옷차림으로 버티는 셈이다. 반대로 신호를 일찍 알아차리고 속도를 미리 늦춘 사람은 같은 국면을 훨씬 얕게 지난다. 접히는 시기의 지혜는 버티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시기의 요령은 뻗던 시절의 기준을 내려놓는 것이다. 왕성하던 때의 목록으로 지금을 채점하면 낙제만 나온다. 이 국면의 일은 목록을 쳐내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것이고, 벌이는 것이 아니라 추스르는 것이다. 밖의 약속을 덜고, 잠을 늘리고, 미뤄 둔 돌아봄을 하는 것. 그것이 이 자리에서는 태만이 아니라 본업이다. 그리고 앞 편들에서 거듭 말했듯, 국면에는 기한이 있다. 접힌 기운은 순환을 따라 다시 펴진다.
목록을 줄인다는 것을 조금 더 구체로 두면 이렇다. 다 내려놓을 수는 없으니, 지킬 것 서너 가지만 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잠의 시각, 하루 한 끼의 제대로 된 밥, 그리고 마음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소일 하나. 나머지는 이 국면 동안 눈을 감아 준다. 청소가 밀려도, 연락이 뜸해져도, 성장이 멈춘 것 같아도. 서너 가지가 지켜지는 한 삶의 골조는 무너지지 않고, 골조만 서 있으면 기운은 돌아와 살을 다시 붙인다.
힘이 나지 않는 시기에는 힘이 나지 않는 대로 지내도 된다. 그것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기운이 제 순서를 지나는 것이다. 다만 하나만 곁에 두자. 이 잦아듦이 너무 길고 무겁게 느껴진다면, 혼자 순환만 믿고 버티기보다 곁의 사람에게, 필요하면 전문가에게 기대어도 된다는 것. 기대는 것 역시 이 국면을 지나는 어엿한 방법이니까.
접혀 본 기운이 깊이를 얻는다. 나는 지금 어느 국면을 지나고 있을까 → 첫 분석 보기 다음 편 · 고요히 차오르는 중입니다 (양) → 이어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