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없다 (절과 태)
끊긴 것 같은 시간,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 십이운성은 그 자리에 절과 태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운이 다 끊긴 자리에서 다음 생명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오래된 관찰.
한눈에
- 십이운성 · 기운이 나고 자라고 스러지는 열두 단계로 삶의 국면을 읽는 눈. 절과 태는 그 순환의 밑바닥이자 첫머리.
- 절 · 기운이 완전히 끊긴 자리. 그러나 끊겨야 비로소 다음 것이 맺힐 자리가 난다.
- 태 · 끊긴 자리에서 새 기운이 처음 맺히는 자리. 아직 형체 없는, 그러나 이미 시작된 시간.
- 허락 · 보이는 것이 없는 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이력서에 적을 것 없는 시간을 지나는 중인 사람이 있다. 일을 그만두고 다음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 오래 하던 것이 끝나고 텅 비어 버린 사람, 무언가를 준비한다고는 하는데 보여 줄 것이 아직 아무것도 없는 사람. 세상의 달력은 그런 시간을 공백이라 부른다. 그런데 명리의 달력에는 그 시간에도 이름이 있다.
십이운성(十二運星) 시리즈에서 다뤘던 열두 단계를 기억하는 분이 있을 것이다. 기운이 잉태되고 태어나 자라고 왕성하다가 스러지고 갈무리되는, 삶의 열두 국면. 그 순환의 밑바닥에 절(絶)이 있고, 바로 다음에 태(胎)가 있다. 오늘은 그 두 자리의 이야기다.
절은 기운이 완전히 끊긴 자리다. 열두 단계 중 가장 기운이 없는 자리, 앞의 순환이 완전히 끝나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다. 이름부터 서늘하다. 끊길 절. 그런데 옛사람들은 이 자리를 순환의 끝에 두지 않고, 다음 시작의 바로 앞에 두었다. 이유가 있다. 완전히 끊겨야 비로소 다음 것이 맺힐 자리가 나기 때문이다. 밭을 다 갈아엎어야 새 씨를 뿌리듯, 앞의 것이 말끔히 비워진 자리가 절이다. 상실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가장 깨끗한 여백의 자리.
옛말에 절처봉생(絕處逢生)이라 했다. 끊어진 자리에서 삶을 만난다는 뜻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에게 건네던 위로의 말이지만, 십이운성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위로이기 전에 관찰이다. 순환의 그림에서 생명이 처음 맺히는 자리는 언제나 완전히 끊어진 자리의 바로 다음이다. 절이 있어야 태가 있다. 어중간하게 남아 있는 미련 위에서는 새것이 맺히지 못한다. 끊어짐이 시작의 조건이라는 것을, 옛사람들은 순환의 지도에 아예 새겨 두었다.
그리고 그 여백에서 태가 맺힌다. 잉태할 태. 새 기운이 처음 점처럼 맺히는 자리다. 아직 형체가 없다. 밖에서 보면 절과 태는 구분되지 않는다. 둘 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이니까. 그러나 안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는 비워지는 중이고, 하나는 맺히는 중이다. 십이운성이 이 보이지 않는 두 시간에 굳이 따로 이름을 붙였다는 것. 나는 그것이 이 체계의 가장 다정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보이는 성취에만 이름을 주는 세상에서, 옛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시간에도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겨울 땅속의 씨앗을 생각한다. 밖에서 보면 그 밭은 죽은 밭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 땅. 그러나 씨앗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봄에 할 일의 전부를 그 어둠 속에서 준비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지금 당신의 시간이 절이라면 비워지는 중인 것이고, 태라면 맺히는 중인 것이다. 어느 쪽이든,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아니다.
이 시기를 지나는 요령도 순환의 결을 따르면 된다. 비워지고 맺히는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 있다. 인생을 총결산하듯 자기를 채점하는 일, 그리고 그 채점 위에서 큰 판단을 내리는 일이다. 빈 들판을 보고 농사를 접겠다고 결정하는 격이다. 대신 어울리는 일이 있다. 걷는 것, 적어 두는 것, 마음이 기웃대는 쪽을 막지 않고 지켜보는 것. 무엇이 맺히고 있는지는 맺히는 쪽이 안다. 우리는 그 곁을 너무 시끄럽게 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니 보여 줄 것이 없는 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남들의 물음에 내밀 답이 없어도, 스스로에게는 이렇게 말해 줄 수 있다. 지금은 순환의 그 자리를 지나는 중이라고. 열두 단계 중 두 단계는 원래 보이지 않는 단계라고.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없었다. 이름이 없던 시간이 있었을 뿐이다. 절과 태라는 이름을 알고 나서, 나는 내 지난 공백들을 다시 적었다. 비워지던 해와 맺히던 해로.
보이지 않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나는 지금 열두 단계의 어디쯤일까 → 첫 분석 보기 다음 편 · 시작하는 사람의 서투름 (장생과 목욕) → 이어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