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은 바뀌는가, 심상(心相)
타고난 골격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얼굴에는 골격 말고도 읽히는 것이 있다. 기색과 표정, 살아온 결. 관상 고전이 상 위에 심상을 두었던 까닭을 읽는다.
한눈에
- 두 겹의 얼굴 · 타고나 바뀌지 않는 골격과, 살아가며 얹히는 기색·표정의 결.
- 심상이란 · 마음의 상. 관상 고전은 골상 위에 심상을 두어 마음을 상의 윗자리로 보았다.
- 오랜 격언 · 상 잘 보는 것이 마음 잘 쓰는 것만 못하다. 관상가들 스스로 적은 말이다.
- 다시 읽기 · 상을 읽는 끝은 체념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겹이 어디인지 아는 일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남는 물음이 하나 있다. 얼굴이 그렇게 타고나는 것이라면, 읽어서 무엇 하나. 지도가 아무리 정교해도 지형을 바꿀 수 없다면, 들여다보는 일이 무슨 소용인가. 관상을 향한 가장 오래된 반문이고, 마땅히 물어야 할 물음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가장 먼저 답을 내놓은 것이 다름 아닌 옛 관상가들이었다.
답의 첫머리는 얼굴이 한 겹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얼굴에는 두 겹이 있다. 아래 겹은 골격이다. 이마의 넓이, 코의 높이, 턱의 두께. 타고나는 것이고,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그 위에 다른 한 겹이 얹힌다. 기색(氣色)이라 부르는 것이다. 얼굴에 도는 빛과 그늘, 눈에 어린 결, 입가에 자리 잡은 표정의 버릇. 이 겹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며 쌓이는 것이다.
같은 골격도 어떤 기색이 얹히느냐에 따라 다른 얼굴이 된다. 오래 웃은 얼굴에는 웃음이 지나간 길이 남고, 오래 굳은 얼굴에는 굳음이 지나간 길이 남는다. 마흔이 넘으면 제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서양의 오랜 말도 결국 이 두 번째 겹을 두고 한 말이다. 골격은 부모가 주지만, 그 위의 결은 살아온 날들이 준다.
옛사람은 이 두 번째 겹의 뿌리를 마음에 두었다. 상은 마음을 따라 생긴다,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 했다. 마음이 오래 머문 자리가 얼굴에 길을 내고, 마음이 바뀌면 그 길도 천천히 바뀐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상 고전은 골상(骨相), 곧 뼈의 상 위에 심상(心相), 마음의 상을 두었다. 얼굴을 읽는 학문이 얼굴보다 높은 자리에 마음을 앉힌 것이다.
여기서 관상의 가장 이상한 문장이 나온다. 관상서에 오래 전해 오는 격언인데, 간추리면 이렇다. 몸의 상을 잘 보는 것이 얼굴의 상을 잘 보는 것만 못하고, 얼굴의 상이 마음의 상만 못하다. 상을 평생 읽은 이들이, 상 읽기의 끝에 이르러 상보다 마음이라고 적은 것이다. 얼핏 관상가의 자기부정처럼 들린다. 그러나 뒤집어 읽으면 이만한 정직이 없다. 지도를 평생 그린 사람이, 지도는 걷는 일만 못하다고 적어 둔 셈이니까.
그러니 상은 바뀌는가라는 물음에 관상은 이렇게 답해 온 셈이다. 아래 겹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위 겹은 바뀐다. 그리고 읽을 값이 있는 것은 오히려 위 겹이다. 바뀌지 않는 골격을 읽는 일이 타고난 지형을 아는 일이라면, 기색을 읽는 일은 지금 그 지형 위로 어떤 날씨가 지나가는지를 아는 일이다. 사주에서 원국과 운을 갈라 읽듯, 관상도 골격과 기색을 갈라 읽는다.
상을 읽는 끝이 체념이 아닌 까닭이 여기 있다. 바꿀 수 없는 겹과 바꿀 수 있는 겹이 어디서 갈리는지를 아는 것. 바꿀 수 없는 것 앞에서 애태우지 않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마음의 몫으로 돌려받는 것. 관상이 끝내 하려던 일은 얼굴의 점괘가 아니라 그 가름이었다.
그 뒤로 나이 든 얼굴들을 다시 보게 되었다. 타고난 것 위에 살아온 것이 얹힌 두 겹의 지도로. 골격이 어떻다는 눈은 점점 심심해지고, 그 위에 무엇이 쌓였는가를 읽는 눈이 오래 머문다. 오래 웃은 길, 오래 견딘 길. 어떤 얼굴은 그 길들만으로 이미 한 편의 이력서였다.
골격은 바뀌지 않지만 기색은 바뀐다. 관상은 그 가름을 알려주는 학문이었다. 내 타고난 지형은 어떤 모양일까 → 첫 분석 보기 다음 편 · 자리는 거울이다 (관상을 닫으며) → 이어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