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이 이름에 드는 자리 (원형이정)
한자 이름의 전통에는 주역의 자리도 있다. 이름의 획수로 괘를 지어 예순네 괘의 뜻으로 읽는 원형이정. 하늘의 네 덕에서 이름을 읽는 눈까지, 그 길을 따라가 본다.
한눈에
- 원형이정 · 주역 건괘에 붙은 네 글자. 봄의 시작, 여름의 자람, 가을의 거둠, 겨울의 갈무리에 견주는 하늘의 네 덕.
- 이름에서는 · 이름의 획수로 괘를 지어 주역 64괘의 뜻에 비추어 읽는 감정법. 인생의 시기를 나누어 읽기도 한다.
- 자리 · 한자 이름 전통의 여러 축 가운데 가장 가벼운 축. 중심이 아니라 마무리의 눈.
- 읽는 태도 · 괘는 판결이 아니라 국면의 언어. 겁의 재료로 쓰지 않는다.
원형이정(元亨利貞). 주역 예순네 괘의 첫머리, 하늘을 뜻하는 건괘에 붙은 네 글자다. 만물을 시작하게 하는 원(元), 자라고 형통하게 하는 형(亨), 이루어 거두게 하는 이(利), 갈무리하여 지키게 하는 정(貞). 봄여름가을겨울에 견주기도 하는, 하늘의 네 가지 덕이다. 이 네 글자가 어쩌다 이름 감정법의 이름이 되었을까.
한자 이름의 전통에는 주역을 끌어들이는 자리가 있었다. 이름 글자들의 획수를 조합해 괘를 짓는 것이다. 획수를 여덟로 나눈 나머지로 아래위 괘를 세우는 식의 셈법을 거치면, 한 이름에서 주역의 괘 하나가 나온다. 그 괘를 64괘의 뜻에 비추어 이름을 읽는다. 하늘과 땅이 사귀는 태괘가 나오면 통하는 이름으로, 막히는 비괘가 나오면 답답한 이름으로 읽는 식이다. 여기에 원형이정의 틀을 얹어, 초년과 중년과 장년과 말년의 시기를 나누어 읽는 법까지 더해진다. 이름 하나에 인생의 사계절을 포개어 보는 셈이다.
이 축의 자리부터 분명히 해 두자. 한자 이름을 보는 여러 눈 가운데서도 이것은 가장 가벼운 축이다. 용신이 중심이고, 소리와 글자의 오행이 그다음이고, 수리가 격식이라면, 원형이정은 다 지은 이름을 마지막으로 한 번 비추어 보는 거울에 가깝다. 이 괘가 아쉽다고 좋은 이름이 무너지지 않고, 이 괘가 좋다고 어긋난 이름이 살아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 거울은 무엇을 보는가. 나는 괘를 판결의 언어가 아니라 국면의 언어로 읽는 쪽이다. 주역의 괘들은 좋은 괘와 나쁜 괘의 목록이 아니라, 시작의 국면, 기다림의 국면, 넘침의 국면처럼 삶이 지나는 예순네 가지 자리의 그림이다. 점을 칠 때조차 괘는 답이 아니라 지금 어느 자리에 있는지를 비추는 물음이었다. 이름에서 괘를 짓던 옛 마음도 그랬을 것이다. 이 이름이 길하냐 흉하냐의 판결을 받으려던 것이 아니라, 이 이름에 시작과 자람과 거둠과 갈무리가 고루 들었는지를 한 번 비추어 보려던 것.
그렇게 읽으면 원형이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감정법의 마음을 말해 준다. 시작하게 하고, 자라게 하고, 거두게 하고, 지키게 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이것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획수로 괘를 짓는 셈법이야 약속이고 격식이지만, 그 격식이 향하던 곳은 한 이름 안에 사계절을 다 넣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겁을 팔 재료가 아니라, 축원의 형식이었던 것이다.
물론 선은 여기서도 긋는다. 획수가 지은 괘가 그 사람의 인생 국면을 실제로 정한다는 근거는 없다. 이 축은 전통의 격식으로 존중하되, 이름을 짓고 무르는 기준으로 삼을 일은 아니다. 다만 다 지어진 이름을 이 거울에 한 번 비추어 보고, 사계절이 고루 들었구나 하고 웃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오래된 격식은 제 몫을 다한 것이다.
시작하고, 자라고, 거두고, 갈무리한다. 따지고 보면 이름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 이 네 마디를 돈다. 글 한 편도, 한 해 농사도, 한 생애도. 이름에까지 그 순환을 새겨 두려던 마음을 생각하면, 셈법의 낡음과 별개로 이 격식이 조금 애틋해진다. 다음 편에서는 이름의 무대를 넓힌다. 사람의 이름을 넘어, 가게의 이름과 반려의 이름이다.
괘는 판결이 아니라 국면의 언어다. 이름의 괘도 축원의 형식으로 읽는다. 나는 지금 어느 국면을 지나고 있을까 → 첫 분석 보기 다음 편 · 사람의 이름, 가게의 이름, 반려의 이름 → 이어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