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이름이란 무엇인가
아홉 편의 축을 다 펼치고 나서 마지막 물음 앞에 선다. 축들이 서로 어긋날 때 무엇을 먼저 보는가. 그리고 좋은 이름이란 결국 무엇인가. 시리즈를 닫는 종합 편.
한눈에
- 어긋날 때의 순서 · 사주에 필요한 기운(용신)이 먼저, 소리의 흐름이 다음, 조후·입묘·공망과 한자 격식들은 다듬는 눈.
- 만점 이름은 없다 · 모든 축을 다 채우는 이름은 없고, 있을 필요도 없다. 중한 것을 지키고 가벼운 것을 놓아주는 것이 작명이다.
- 좋은 이름 · 결점 없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지어져 오래 정답게 불리는 이름.
- 개명 앞에서 · 이름 탓이라는 진단은 대개 부풀림이다. 다만 제 이름과 화해하는 계기로서의 개명은 존중한다.
축을 아홉 편에 걸쳐 펼쳤다. 사주에 필요한 기운을 담는 용신, 부르는 소리의 흐름, 계절의 치우침을 고르는 조후, 약한 자리를 피하는 입묘와 공망. 한자 이름으로 넘어가면 글자의 뿌리, 획의 격식, 괘의 거울까지. 그런데 실제로 이름을 지어 보면 곧 알게 된다. 이 축들이 서로 다른 답을 낼 때가 온다. 소리가 순한 이름은 필요한 기운이 옅고, 기운이 꼭 맞는 글자는 획이 아쉽다. 그때 무엇을 따라야 하나.
순서는 시리즈 내내 깔아 둔 그대로다. 그 사주에 필요한 기운이 먼저다. 이름의 존재 이유가 그 사람이니, 그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가 첫 기준이 된다. 소리의 흐름이 다음이다. 이름은 결국 불리는 것이라, 담은 기운은 소리를 타고 흐른다. 그리고 조후와 입묘·공망은 거스르지 않는지 확인하는 눈, 한자의 수리와 자원과 괘는 같은 값이면 더 곱게 다듬는 눈이다. 중한 것과 가벼운 것의 차례가 이렇게 서 있으면, 축들이 부딪혀도 길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이 차례가 곧바로 알려 주는 것이 있다. 만점 이름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축을 다 채우려 들면 이름은 지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글자와 소리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실무의 작명이란 만점을 찾는 일이 아니라, 중한 것을 지키고 가벼운 것을 놓아주는 일이다. 필요한 기운을 담았고 소리가 흐른다면, 획 하나가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두어도 된다. 그 아쉬움이 그 이름의 흠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항목에 만점을 매겨 주겠다는 작명이 있다면, 그쪽을 의심해야 한다.
말로만 두면 공허하니, 가상의 아이 하나를 지어 이 순서를 걸어 보자. 한겨울 깊은 밤에 태어난 을목(乙木)의 아이가 있다고 하자. 물이 왕성한 계절에 태어난 여린 나무라, 사주는 차고 습한 쪽으로 기울었고 무엇보다 볕이 아쉽다. 용신은 화(火)로 잡힌다. 첫 자리가 정해졌으니 이름에 담을 것은 따뜻한 기운이다. 성이 김이라면 어금닛소리로 목(木)의 문을 여니, 혓소리로 시작하는 글자가 뒤에 서면 목이 화를 낳으며 순하게 흐른다. 다래라는 이름을 놓아 보자. 다도 래도 혓소리, 화의 기운이 겹으로 들고, 김에서 다로, 다시 래로 기운이 낳아 주며 흘러간다. 겨울 사주에 데우는 소리를 입혔으니 조후도 거스르지 않았고, 그 사주의 갇히고 빈 자리만 피해 갔는지 마지막으로 한 번 살피면 된다. 한자를 붙일 이름이라면 여기서 글자의 뜻과 획을 더 다듬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눈여겨볼 것은 이름이 아니라 순서다. 다래가 정답이라는 말이 아니다. 같은 사주 앞에서도 다른 좋은 이름은 얼마든지 나온다. 다만 어떤 이름이 나오든, 사주를 먼저 읽고 필요한 것을 정한 뒤에 소리와 온도를 맞춰 갔다는 순서만은 같다. 그리고 겨울에 태어난 아이가 다래라 불릴 때마다, 부르는 사람은 모르는 채로 그 아이에게 볕을 한 줌씩 건네는 셈이 된다. 나는 이 대목이 성명학의 가장 정다운 자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좋은 이름이란 무엇인가. 열 편을 지나온 내 답은 이렇다. 좋은 이름은 결점 없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지어진 이름이다. 그리고 하나 더, 오래 정답게 불리는 이름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지어도 부르는 사람들이 아껴 부르지 않으면 이름은 마르고, 격식이 좀 허술해도 사랑으로 불리는 이름은 산다. 지어지는 것은 한 번이지만 불리는 것은 평생이니, 이름의 운은 절반쯤 부르는 입들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 자리에서 개명 이야기를 짧게 하고 닫아야겠다. 일이 풀리지 않아 이름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다. 먼저 말해 두면, 이름 탓이라는 진단은 대개 부풀림이다. 삶이 막히는 까닭은 운의 계절에서, 자리에서, 몸에서 찾는 것이 먼저다. 이름은 그 목록의 끝에 있다. 다만 이런 개명은 존중한다. 제 이름이 평생 싫었던 사람이, 제 사주를 읽고 제게 필요한 것을 알고서, 그것을 담은 이름으로 저를 다시 부르기로 하는 것. 그것은 운명을 고치는 주술이 아니라 자기와 화해하는 의식이고, 그런 의식은 효험을 따질 일이 아니다.
이름은 사주를 바꾸지 못한다. 첫 편의 첫 대답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 이 문장은 처음과 조금 다르게 읽힌다. 처음에는 성명학의 한계를 긋는 문장이었는데, 이제는 성명학의 자리를 알려 주는 문장으로 들린다. 바꾸지 못하기 때문에, 이름은 사주를 읽는다. 고치지 못하기 때문에, 곁을 고른다. 그리고 그 읽음과 고름의 정성이, 한 사람이 평생 불릴 소리 안에 접혀 들어간다. 이름을 짓는 일이 한 사람을 가장 오래 들여다보는 형식이라던 첫 편의 문장에, 이제 한 줄을 보탤 수 있겠다. 그 들여다봄은, 불릴 때마다 조금씩 되살아난다.
좋은 이름은 결점 없는 이름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알고 지어져 오래 정답게 불리는 이름이다. 내게 필요한 기운을 아는 데서 시작하기 → 첫 분석 보기 시리즈 처음부터 · 이름과 사주가 무슨 상관인가 → 다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