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행(操行)에는 늘 한결같은 어짊이 있으나, 벼슬살이에는 늘 한결같은 만남[遇]이 없다.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재능이요,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때이다. 재능이 높고 행실이 깨끗하다고 해서 반드시 존귀해진다고 보장할 수 없고, 능력이 얕고 조행이 탁하다고 해서 반드시 비천해진다고 보장할 수 없다. 혹은 높은 재능과 깨끗한 행실을 지녔어도 [군주를] 만나지 못해 물러나 하류에 있고, 얕은 능력과 탁한 조행으로도 만나서 뭇사람 위에 있다. 세상에는 각기 선비를 취하는 나름의 방식이 있고, 선비 또한 각기 나아가는 나름의 방식이 있다. 나아감은 만남에 달려 있고, 물러남은 만나지 못함에 달려 있다. 높은 자리에 처하고 현달한 곳에 거하는 것은 반드시 어질어서가 아니라 만났기 때문이며, 지위가 낮아 아래에 있는 것은 반드시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나면 혹 [더러운] 행실을 품고도 걸(桀)의 조정에서 존귀해지고, 만나지 못하면 혹 깨끗한 절개를 지니고도 요(堯)의 조정에서 비천해진다. 만나고 만나지 못하는 까닭은 한 가지가 아니다. 혹은 때마침 어진데 악한 [군주를] 보좌하고, 혹은 큰 재능으로 작은 재능을 따르며, 혹은 둘 다 큰 재능이나 도(道)에 청(淸)·탁(濁)이 있고, 혹은 도덕이 없으나 기예로 영합하고, 혹은 기능이 없으나 용색으로 총애를 받는다.
오원(伍員)과 백희(帛喜)는 함께 부차(夫差)를 섬겼는데, 백희는 존중받고 오원은 주살되어 죽었으니, 이는 조행은 다르나 군주는 같은 경우이다. 혹은 조행은 같으나 군주가 달라서 또한 만남과 만나지 못함이 있으니, 이윤(伊尹)과 기자(箕子)가 그러하다. 이윤과 기자는 재능이 대등하였으나, 이윤은 재상이 되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으니, 이윤은 성탕(成湯)을 만났고 기자는 상주(商紂)를 만났기 때문이다. 어진 이로서 어진 군주를 섬기면, 군주는 다스리고자 하고 신하는 어진 재능으로 그를 보좌하여 나아가고 버리는 바가 우연히 합치하니, 그 만남은 진실로 마땅하다. 어진 이로서 악한 군주를 섬기면, 군주는 다스리고자 하지 않고 신하는 충성스러운 행실로 그를 도우니, 조행과 뜻이 어긋나 만나지 못함이 진실로 마땅하다.
혹은 성현(聖賢)의 신하로서 다스리고자 하는 군주를 만났으나 끝내 만나지 못함이 있으니, 공자(孔子)와 맹가(孟軻)가 그러하다. 공자는 진(陳)·채(蔡)에서 양식이 끊겼고 맹가는 제(齊)·양(梁)에서 곤궁하였는데, 당시의 군주가 선한 이를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재능이 낮고 지혜가 얕아 큰 재능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천리마를 부릴 수 있는 이는 반드시 왕량(王良)이고, 우(禹)·직(稷)·고요(皋陶)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 이는 반드시 요(堯)·순(舜)이다. 백 리를 모는 솜씨로 천 리를 달리는 발을 조련하면 반드시 멍에대가 꺾이고 멍에가 부러지는 우환이 있다. 머릿수만 채우는 신하[具臣]를 대하는 재능으로 대신(大臣)의 지혜를 부리면 반드시 마음이 닫히고 뜻이 막히는 변고가 있다. 그러므로 지극한 말이 버려지고 성현이 거절당하는 것은 성현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지극한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성현은 높은 것을 힘쓰니 지극한 말은 행하기 어렵다. 큰 재능으로 작은 재능에게 [벼슬을] 구하면 작은 재능은 받아들일 수 없으니, 만나지 못함이 진실로 마땅하다.
혹은 큰 재능의 신하로서 큰 재능의 군주를 만났으나 만남과 만나지 못함이 있으니, 우순(虞舜)·허유(許由)·태공(太公)·백이(伯夷)가 그러하다. 우순과 허유는 모두 성인으로, 함께 당(唐)의 세상에 태어나 모두 요를 대면하였다. 우순은 제왕의 계통을 이었고 허유는 산림으로 들어갔다. 태공과 백이는 모두 어진 이로, 함께 주(周)나라에 나와 모두 무왕(武王)을 뵈었다. 태공은 봉함을 받았고 백이는 굶어 죽었다. 현성(賢聖)은 도가 같고 뜻이 합하며 나아감이 가지런한데, 우순과 태공은 행실이 우연히 합하고 허유와 백이는 조행이 어긋난 것은, 태어남이 그 세상이 아니고 나옴이 그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가 비록 같으나 같은 가운데 다름이 있고, 뜻이 비록 합하나 합한 가운데 어긋남이 있다. 어째서인가? 도에는 정밀함과 거침이 있고, 뜻에는 청(淸)·탁(濁)이 있기 때문이다. 허유는 황자(皇者)의 보좌인데 제자(帝者)의 시대에 태어났고, 백이는 제자의 보좌인데 왕자(王者)의 세상에 나왔으니, 모두 도덕에 말미암고 함께 인의(仁義)를 드러냈다. 군주가 도덕을 행함이 맑지 않으니 머무르지 않았고, 군주가 인의를 행함이 높지 않으니 그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들이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요는 혼탁하고 순은 탁하며, 무왕은 잔학한 자를 주살하고 태공은 포악한 자를 토벌하였으니, 똑같이 탁하고 모두 거칠어 거동과 조처가 균등하게 가지런하였으니, 이것이 그들이 만난 까닭이다. 그러므로 순이 천하에 왕 노릇 할 때 고요가 정사를 보좌하였으나 북인무택(北人無擇)은 깊이 숨어 나타나지 않았고, 우가 천하에 왕 노릇 할 때 백익(伯益)이 다스림을 보좌하였으나 백성자고(伯成子高)는 지위를 버리고 밭을 갈았다. 고요의 재능이 무택보다 낫고 백익의 능력이 자고보다 뛰어난 것이 아닌데도, 고요와 백익은 나아가 쓰이고 무택과 자고는 물러나 숨었으니, 나아가 쓰인 이는 행실이 우연히 합하고 물러나 숨은 이는 조행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물러나 숨은 이는 형세가 달라 몸은 비록 굽혀도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군주는 그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아 그를 버리는 뜻에도 한스러움이 없었으니, 이는 양쪽이 서로 사모하지 않은 것이다.
상앙(商鞅)이 진효공(秦孝公)에게 세 번 유세하였는데, 앞의 두 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뒤의 한 번은 채용되었으니, 앞의 두 번은 제왕(帝王)의 논이고 뒤의 한 번은 패자(霸者)의 의론이었기 때문이다. 제왕의 논을 가지고 패자인 군주에게 유세하면 비록 정밀해도 거절당하고, 다시 패자의 설로 바꾸면 비록 거칠어도 받아들여진다. 어째서인가? 정밀한 것은 효공이 얻기를 [원하지] 않는 바를 만났고, 거친 것은 효공이 행하고자 하는 바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세는 [말이] 좋은 데 있지 않고 유세를 듣는 자가 그것을 좋게 여기는 데 있으며, 재능은 어짊을 기다리지 않고 섬기는 자가 그것을 어질게 여기는 데 있다. 마부[馬圄]의 말은 법도가 없으나 시골 사람이 그것을 기뻐하였고, 자공(子貢)의 말은 의리가 있으나 시골 사람이 듣지 않았다.
퉁소를 부는 악공[吹籟工]이 좋은 소리를 내었으나 월왕(越王)이 기뻐하지 않으므로 다시 야한 소리를 내니 월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원하지 않는 군주에게 좋은 것을 행하면 비록 좋아도 사랑받지 못하고, 좋지 않은 것을 원하는 군주에게 좋지 않은 것을 행하면 비록 좋지 않아도 미움받지 않는다. 이는 자잘한 기예로 영합한 것이니, 합하면 만나고 합하지 않으면 만나지 못한다. 혹은 기예가 없으면서 망령되이 간교함으로 윗사람의 뜻에 영합하여 또한 만나는 경우가 있으니, 비녀를 훔친 신하와 닭 울음을 낸 식객이 그러하다. 비녀를 훔친 신하는 자반(子反)에게 친근하였고, 닭 울음을 낸 식객은 맹상군(孟嘗君)에게 총애받았다. 자반은 도둑질하는 신하를 좋아하였고, 맹상군은 거짓[을 잘하는] 식객을 아꼈다. 군주에게 보탬이 있어 군주가 그에 의지하였으니 그 만남은 진실로 마땅하다. 혹은 보탬이 없으나 윗사람이 좋아하는 바가 되었으니, 적유(籍孺)·등통(鄧通)이 그러하다. 적유는 효혜제(孝惠帝)에게 총애받았고, 등통은 효문제(孝文帝)에게 사랑받았다. 자잘한 재능도 미미한 능력도 없었으나, 우연히 형체가 아름답고 골격이 우아하며 피부가 곱고 용색이 걸맞았다. 좋은 용모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바이니 그 만남은 진실로 마땅하다. 혹은 추한 얼굴과 나쁜 용색으로 윗사람에게 사랑받았으니, 모모(嫫母)·무염(無鹽)이 그러하다. 모모는 황제(黃帝)에게 나아갔고, 무염은 제왕(齊王)에게 들여졌다. 그러므로 어짊과 어리석음은 미리 알 수 있으나, 만남은 앞서 도모하기 어렵다. 어째서인가? 군주의 좋아함과 싫어함은 일정함이 없고 신하가 나아가는 바는 미리 정해짐이 없어, 우연히 합하는 것이 옳은 것이 되고 마침 맞는 것이 뛰어난 것이 된다. 나아간 자가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고 물러난 자가 반드시 어리석은 것은 아니니, 합하여 운이 좋으면 나아가고 운이 나쁘면 그것을 잃는다.
세속의 의론에 이르기를 “어진 사람은 [군주를] 만날 수 있으니, 만나지 못함 또한 스스로의 허물이다. 살면서 세상을 살피고[希世] 군주에 맞추며[准主], 다스림의 내막을 관찰하고 능력을 조절하며 유세를 정하고, 말을 살펴 기회를 만나 나아가서 군주에게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어찌 만나지 못함이 있겠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무익한 능력을 짓고 보탬 없는 유세를 바치니, 여름에 화로를 올리고 겨울에 부채를 바치는 격이다. [군주가] 얻고자 하지 않는 일을 하고 듣고자 하지 않는 말을 바치니, 화를 당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어찌 복과 도움이 있겠는가?” 하였다. 능력을 바쳐 유익함이 있고 유세를 바쳐 보탬이 있음은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그러나 혹은 보탬이 없는데도 도움을 얻고, 혹은 유익함이 있는데도 죄를 얻는다. 또한 여름철 화로로 젖은 것을 말리고 겨울철 부채로 불을 [일으키니], 세상은 살필 수 있으나 군주는 맞출 수 없다. 유세는 바꿀 수 있으나 능력은 바꿀 수 없다. 세상의 군주가 문(文)을 좋아하면 자기가 문을 하면 만나고, 군주가 무(武)를 좋아하면 자기는 만나지 못한다. 군주가 변론을 좋아하면 말재주가 있으면 만나고, 군주가 변론을 좋아하지 않으면 자기는 만나지 못한다. 문을 좋아하는 군주는 무를 좋아하지 않고, 무를 좋아하는 군주는 문을 좋아하지 않으며, 변론을 좋아하는 군주는 행실을 좋아하지 않고, 행실을 좋아하는 군주는 변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문장과 언변은 오히려 급히 익힐 수 있으나, 행실과 능력은 갑자기 이룰 수 없다. 배움을 오래 익히지 않으면 이름을 밝힐 수 없고, 이름이 평소 드러나지 않으면 군주를 만날 수 없다. 창졸간의 업과 잠깐의 이름은 날마다의 힘이 부족하여 미리 알려지지 않으니, 어떻게 군주에 맞추어 그 유세를 바치고 몸을 나아가게 하여 그 능력을 맡기겠는가? 옛날 주(周)나라 사람 가운데 벼슬하려 하였으나 여러 번 만나지 못하고 나이 들어 머리가 희어져 길에서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우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나는 벼슬하려 하였으나 여러 번 만나지 못하였고, 스스로 나이 들어 때를 잃은 것을 슬퍼하니 이 때문에 운다.”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벼슬함에 어찌하여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문(文)을 배웠다. 문덕(文德)이 이루어져 비로소 벼슬하고자 하였더니 군주는 노인을 쓰기를 좋아하였다. 노인을 쓰던 군주가 죽고 뒤의 군주는 또 무(武)를 썼으므로 나는 다시 무를 익혔다. 무의 절도가 비로소 이루어지자 무를 쓰던 군주가 또 죽었다. 어린 군주가 비로소 즉위하여 젊은이를 쓰기를 좋아하였는데 내 나이는 또 늙었다. 이 때문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다.” 하였다. 벼슬살이에는 때가 있으니 구할 수 없다. 세상을 살피고 군주에 맞추는 것조차 오히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절개가 높고 뜻이 오묘하여 이익에 움직이지 않고, 성품이 정해지고 자질이 이루어져 군주를 위해 돌아보지 않는 자이겠는가?
또한 만남이란 능력을 미리 마련하지 않고 유세를 미리 갖추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기쁨을 만나고 윗사람의 뜻에 부딪쳐 맞으므로 이를 만남[遇]이라 한다. 만약 군주를 헤아려 유세를 조절하여 존귀함을 취한다면 이는 이름하여 헤아림[揣]이지 만남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봄에 곡식을 심으면 자라고 가을에 곡식을 베면 거둔다. 물건을 구하여 물건을 얻고 일을 하여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만남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구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르고 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을 이름하여 만남이라 한다. 마치 길에서 떨어진 것을 줍고 들에서 버려진 것을 줍는 것과 같고, 하늘이 주고 땅이 낳으며 귀신이 돕고 신이 보좌하는 것과 같으며, 금식(禽息)의 정령이 몰래 경사를 주고 포숙(鮑叔)의 혼이 묵묵히 천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것이 곧 만남일 뿐이다. 지금 세속 사람들은 만남과 만나지 못함의 논을 정하지 못하고, 또 만남에 나아가 그를 기리고 만나지 못함으로 인해 그를 헐뜯는다. 이는 드러난 효과에 근거하고 이루어진 일을 살필 뿐, 조행을 헤아리고 재능을 살필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사람이 벼슬살이에 머물러 나아가지 못함이 있고, 행실과 절개에 훼손되어 온전하지 못함이 있으며, 죄과에 누적되어 제거되지 않음이 있고, 명성에 어두워 밝지 못함이 있는 것은, 재능이 낮아서가 아니고 행실이 어그러져서가 아니며, 지혜가 있어 어둡지 않고 계책이 어리석지 않은데도, 바깥의 재화를 만나 누해(累害)를 입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행실뿐 아니라 무릇 사물이 모두 그러하다. 살아 움직이는 무리는 모두 누해를 입는다. 누해는 바깥에서 오는 것이지 그 안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누해가 생겨나는 근원을 따지지 않고 한갓 누해를 입은 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지혜가 밝지 못하여 이치에 어둡고 막힌 자이다. 사물은 봄에 나면 사람이 그것을 보전하지만, 가을에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이 반드시 보전할 수는 없다. 갑자기 소나 말이 뿌리를 밟고 칼과 낫이 줄기를 자르면 난 것이 자라지 못하여 가을에 이르러 이루어지지 못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무리는 해를 만나 이루지 못하여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쥐가 밥 가운데를 지나가면 버리고 먹지 않는다. 버린 밥의 맛은 저 더럽혀지지 않은 것과 같으나, 쥐를 해로 여겨 버리고 먹지 않는다. 군자의 누해는 저 자라지 못한 사물, 먹지 않는 밥과 실상이 같다. 모두 바깥에서 오므로 누해라 한다.
몸을 닦고 행실을 바르게 하여도 복을 오게 할 수 없고, 두려워 떨며 경계하고 삼가도 화를 피할 수 없다. 화와 복이 이르는 것은 행(幸)·불행(不幸)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얻음이 자기 힘에 말미암지 않으므로 이를 복이라 하고, 옴이 나에게 말미암지 않으므로 이를 화라 한다.” 하였다. 나에게 말미암지 않는 것은 무엇에 말미암는다고 하는가? 향리와 조정에 말미암는다. 향리에는 세 가지 누(累)가 있고, 조정에는 세 가지 해(害)가 있다. 누는 향리에서 생기고 해는 조정에서 일어나니, 예나 지금이나 재능이 크고 행실이 맑은 사람이 이를 만난 경우가 많다. 무엇을 세 가지 누와 세 가지 해라 하는가? 무릇 사람의 조행은 벗을 신중히 가릴 수 없으니, 벗이 마음이 같으면 은혜가 두텁고 마음이 다르면 [은혜가] 얇으며, 얇으면 원망하고 한스러워하여 그의 행실을 훼손하니, 이것이 첫째 누이다. 사람의 재능의 높고 낮음은 고르게 같을 수 없으니, 동시에 함께 나아가면 높은 자는 영화를 얻고 낮은 자는 부끄러워하며 성내어 그의 행실을 훼손하니, 이것이 둘째 누이다. 사람의 사귐은 늘 즐거울 수 없으니, 즐거우면 서로 친하고 분하면 소원해지며, 멀어지면 원망하고 한스러워하여 그의 행실을 훼손하니, 이것이 셋째 누이다. 자리는 적고 사람은 많아 벼슬하는 자가 다투어 나아가고 나아간 자가 자리를 다투어, 장(將)을 뵙고 서로 헐뜯으며 [허물을] 보태고 끌어다 붙이는데, 장이 어두워 밝지 못하여 그 말을 받아들이니, 이것이 첫째 해이다. 장리(將吏)는 좋아하는 바가 다르고 청탁(淸濁)의 조행이 달라서, 맑은 관리는 성대한 결백함을 더하고 맑디맑은 말을 들어 올리니, 탁한 관리는 성냄과 원한을 품어 천천히 그의 허물을 찾아내어 미세한 비방을 빌미로 죄벌을 입히니, 이것이 둘째 해이다. 장이 혹 보좌하는 관리[佐吏]의 몸을 총애하여 그 말을 받아들이고 믿는데, 좌리가 맑은 절개가 아니면 반드시 사람을 차례를 뛰어넘어 발탁하고, 그 뜻을 거스르면 도를 넘게 헐뜯으니, 맑고 바른 선비는 행실을 높이고 뜻을 펴다가 마침내 미움을 받아 장에게 훼손당하니, 이것이 셋째 해이다. 아직 나아가지 않았을 때는 몸이 세 가지 누를 입고, 이미 쓰였을 때는 몸이 세 가지 해를 입으니, 비록 공구(孔丘)·묵적(墨翟)이라도 스스로 면할 수 없고, 안회(顏回)·증삼(曾參)이라도 몸을 온전히 할 수 없다.
온갖 행실을 움직이고 만 가지 일을 지으면 질투하는 사람이 따라서 구름처럼 일어나니, 가시나무가 몸에 걸리고 벌과 전갈의 무리가 조행을 품은 이를 쪼고 쏘는 것이 어찌 여섯 가지뿐이겠는가! 여섯 가지가 뚜렷한데도 세상은 일찍이 보지 못한다. 선비의 조행에 세 가지 누가 있고 벼슬살이에 세 가지 해가 있음을 근원까지 따지지 않고, 몸이 온전한 자를 깨끗하다 하고 훼방을 입은 자를 욕되다 하며, 관직이 오른 자를 선하다 하고 지위에서 폐출된 자를 악하다 한다. 온전하고 승진한 것은 행운인데도 그를 칭찬하고, 훼방받고 폐출된 것은 만나지 못한 것인데도 그를 헐뜯으니, 마음 씀이 이와 같으면 반드시 세 가지 누와 세 가지 해가 된다. 논하는 자들이 이미 누해를 [입은] 자의 행실이 어질고 깨끗함을 알지 못하니, 진흙으로 흙벽에 바르고 먹으로 비단에 점을 찍은 것을 누가 알겠는가? 맑은 것은 먼지를 받고 흰 것은 때를 타니, 푸른 파리[靑繩]가 더럽히는 것은 늘 흰 비단에 있다. 꼭대기에 처한 자는 위태롭고 형세가 풍성한 자는 이지러지니, 무너져 떨어지는 무리는 늘 매달린 곳에 있다. 굴평(屈平)이 깨끗하고 희니 고을의 개들이 떼 지어 짖었는데, 짖는 것은 괴이하게 여기는 바이다. 준걸을 비방하고 호걸을 의심하는 것은 본디 용렬한 자들의 짓이다. 훌륭한 선비는 준걸의 재능 때문에 뭇 짖는 소리를 불러들인다. 이와 같다면 어찌 다시 노비 같은 아랫사람이 되기를 힘쓰고 불초함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불초하고 노비 같은 아랫사람은 힘쓸 바가 아니다. 어찌 다시 세속에 영합하여 몸을 온전히 함으로써 비방을 그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세속에 영합하여 몸을 온전히 하는 것은 곧 향원(鄉原)이다. 향원인 사람은 행실이 온전하여 흠이 없으니, 비난하려 해도 들 것이 없고 꼬집으려 해도 꼬집을 것이 없다. 이 또한 공자가 죄로 여긴 바이고 맹가가 허물로 여긴 바이다.
옛 어진 이는 아름다움이 지극하였으나 몸을 지킬 방도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품과 행실을 따르며 누해를 기다리는 자가 과연 어질고 깨끗한 사람이니, 누해의 비방이 극에 달하면 어질고 깨끗한 실상이 드러난다. 어질고 깨끗한 자취를 세웠는데 훼방의 먼지가 어찌 생겨날 수 있겠는가? 현악기를 타는 자는 백아(伯牙)의 손가락을 꺾고 싶어 하고, 수레를 모는 자는 왕량의 손을 부수기를 바란다. 어째서인가? 좋고 훌륭하다는 이름을 독차지하고자 하여 저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위(魏)나라 여인이 용색이 고우니 정수(鄭袖)가 그의 코를 (鼻)[劓] 베었고, 조오(朝吳)가 충성스럽고 곧으니 무기(無忌)가 그를 쫓아냈다. 척시(戚施)는 더욱 질투하고 거저(蘧除)는 아첨이 많다. 이 때문에 축축한 집에는 먼지를 쓸지 않고 낮은 집은 바람을 가리지 않으며, 바람이 들이치는 곳의 사물은 자랄 수 없고 물살이 급한 언덕은 가파를 수 없다. 이와 같으니 유리(牖里)와 진채(陳蔡)의 [곤액을] 알 수 있고, 강에 빠지고 황하에 뛰어든 일도 [알 수 있다]. 뛰어난 재능으로 세속에 용납되고 아첨을 취하며 장에게서 공명을 온전히 구하여, 등석(鄧析)의 화를 만나지 않고 자서(子胥)의 주살을 취하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맹분(孟賁)의 시신을 사람들이 칼로 찌르지 않는 것은 기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죽은 재 백 곡(斛)에 사람들이 물을 붓지 않는 것은 빛이 꺼졌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여 지혜를 드러내고 세상에 빛과 기운을 드러내며, 뜻을 떨쳐 무리에게 오만하고 세속에서 탁월함과 기이함을 세우면, 본디 늘 사람들이 참소하고 질투하는 바가 된다. 곧은 마음으로 세속에 영합하는 누로써 보탬을 구하나 도리어 손해를 본다. 대개 공자가 근심한 까닭이고 맹가가 슬퍼한 까닭이다.
덕이 큰 자는 비방을 부르고, 선비된 자는 [남의] 입에 많이 오르내린다. 아름답고 성대한 명성으로 입과 혀의 우환을 그치게 하여 위태롭게 기울어지는 해가 없기를 구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 장창(臧倉)의 헐뜯음은 일찍이 끊어진 적이 없고, 공백료(公伯寮)의 참소는 일찍이 사라진 적이 없다. 개밋둑이 쌓여 언덕과 산이 되고, 웅덩이가 강과 하천이 된다. 이와 같으니 저자에 범이 있다는 헛소문과 베틀의 북을 던진 오해는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되고, 옥이 변하여 돌이 되고 구슬이 변하여 자갈이 되는 것도 기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어째서인가? 어두운 마음의 몽매한 지혜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왕(文王)이 분토(糞土)가 되고 악래(惡來)가 금옥(金玉)이 된 까닭이다. 주(紂)가 성인을 미워하고 악인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마음과 지혜가 미혹되고 가려졌기 때문이니, 가려지고 미혹되어 살필 수 없으면 미자(微子)가 열 번 떠나고 비간(比干)이 다섯 번 쪼개져도 애통해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삼감(三監)이 성인을 참소하니 주공(周公)이 초(楚)로 달아났고, 계모가 효자를 헐뜯으니 백기(伯奇)가 쫓겨나 떠돌았다. 당시 주나라 세상에 누가 미혹되지 않았겠는가? 뒤에 「치효(鴟鴞)」가 지어지고 「서리(黍離)」가 일어났으니, 그것을 풍자하여 읊은 자들은 곧 이를 슬퍼하였다. 그러므로 우레와 바람의 변고가 없었다면 주공의 악명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지 않았다면 추(鄒)(行)[衍]의 죄는 제거되지 않았을 것이다. 덕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고 정성이 변고를 움직일 수 없다면, 군자는 독실하게 믿으며 자기를 살필 뿐이니 어찌 남에게서 오는 누해를 막을 수 있겠는가? 성현은 이름을 다스리지 않아 해가 이르러도 피하지 않으니, 형체상 검은 단점이 드러나고 흰 장점은 가려 숨겨진다. 몸의 억울함을 해명하지 않고 떠도는 말을 그치게 하지 않으며, 때를 받고 훼방을 취하며 깨끗하고 온전하기를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은 드러나고 선은 드러나지 않으며, 행실은 결함이 있고 자취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악하고 거짓된 사람은 몸을 다스려 세속에 교묘하게 하고, 속임을 닦아 뭇사람에게 영합한다. 마치 쟁반과 사발에 옻칠하는 장인이 뚫은 틈을 보이지 않고, 구슬과 칼을 놀리는 광대의 손가락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세상은 단점을 보지 못하므로 함께 그를 칭찬하고, 장은 악을 듣지 못하므로 그를 드러내 쓴다. 이와 같다면 세속이 이른바 어질고 깨끗하다는 자가 반드시 악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이른바 사악하고 더럽다는 자가 반드시 선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말에는 우환을 부름이 있고 행실에는 치욕을 부름이 있으니, 그 소재는 늘 소인에게서 말미암는다.” 하였다. 소인은 본성이 우환과 치욕인 자이니, 사악함을 품고 태어나고 거짓을 품고 노닐며 누해 가운데서 목욕하니, 어찌 부르고 초래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에서 사는 것은 (濕)[燥]함에 상하지 않고, 물에 사는 것은 빠질 우환이 없다. 불은 뜨거움을 괴로워하지 않고 물은 차가움을 아파하지 않으니, 기의 성질이 자연히 그러한 것인데 [어찌] 그것을 부르겠는가? 군자는 충언으로 우환을 부르고 고상한 행실로 치욕을 부르니, 어느 세상인들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태산 같은 악이라도 군자는 [그] 이름을 얻지 않고, 털끝 같은 선이라도 소인은 가질 수 없다. 더럽힘으로 말하면 맑은 것이 먼지를 받고 흰 것이 때를 타는 것이요, 훼방으로 말하면 곧고 어진 이가 질투를 받고 높고 뛰어난 이가 떠들썩한 비난을 받는 것이며, 죄를 만남으로 말하면 충언이 우환을 부르고 고상한 행실이 치욕을 부르는 것이요, 순수하지 않음으로 말하면 옥에 티가 있고 구슬에 흠이 있는 것이다. (焦)진류(陳留)[焦]군(君)(兄)[貺]은 연주(兗州)에서 이름이 알려졌고 행실이 온전하고 자취가 깨끗하여 티끌만 한 훼방도 없었는데, 그가 종사(從事)가 되어야 할 때에 이르러 자사(刺史) 초강(焦康)이 물리치고 쓰지 않았다. 아직 나아가지 않았을 때는 세 가지 누를 입고, 이미 쓰였을 때는 세 가지 해를 입으니, 비록 공구·묵적이라도 스스로 면할 수 없고, 안회·증삼이라도 몸을 온전히 할 수 없다. 어째서인가? 뭇사람이 좋아하는 순전한 명예의 사람은 참된 어진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후(公侯) 이하는 옥과 돌이 뒤섞여 있다. 어진 선비의 행실은 선과 악이 서로 감싸고 있다. 옥을 캐는 자는 돌을 깨뜨려 옥을 뽑아내고, 선비를 고르는 자는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한다. 이와 같다면 누해를 입은 사람은 세상을 등에 지고 행하니, 그를 손가락질하고 공격하는 자들은 어디로 가겠는가!
무릇 사람이 만남과 누해를 당하는 것은 모두 명(命)에 말미암는다. 죽고 살며 오래 살고 일찍 죽는 명이 있고, 또한 귀하고 천하며 가난하고 부유한 명이 있다. 왕공(王公)으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성현으로부터 하우(下愚)에 이르기까지, 무릇 머리와 눈이 있는 부류와 피를 머금은 무리는 명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명이 빈천해야 한다면 비록 그를 부귀하게 하여도 오히려 화환(禍患)을 겪는다. 명이 부귀해야 한다면 비록 그를 빈천하게 하여도 오히려 복과 선을 만난다. 그러므로 명이 귀하면 천한 처지에서도 스스로 현달하고, 명이 천하면 부유한 자리에서도 스스로 위태로워진다. 그러므로 부귀는 신(神)의 도움이 있는 듯하고, 빈천은 귀(鬼)의 재앙이 있는 듯하다. 명이 귀한 사람은 함께 배워도 홀로 현달하고 함께 벼슬하여도 홀로 승진하며, 명이 부유한 사람은 함께 구하여도 홀로 얻고 함께 하여도 홀로 이룬다. 빈천한 이는 이와 반대로 현달하기 어렵고 승진하기 어려우며 [얻기 어렵고] 이루기 어려우니, 허물을 얻고 죄를 받으며 병들고 잃어버려 그 부귀를 잃고 빈천해진다. 이 때문에 재능이 높고 행실이 두텁다고 반드시 부귀할 것을 보장할 수 없고, 지혜가 적고 덕이 얇다고 반드시 빈천할 것을 믿을 수 없다. 혹은 때로 재능이 높고 행실이 두터워도 명이 나빠서 폐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지혜가 적고 덕이 얇아도 명이 좋아서 일어나 뛰어넘는다. 그러므로 일에 임하여 지혜롭고 어리석음, 조행의 맑고 탁함은 성(性)과 재(才)이고, 벼슬살이의 귀천, 재산 경영의 빈부는 명(命)과 시(時)이다. 명은 힘써 [바꿀] 수 없고 시는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니, 지혜로운 자는 이를 하늘에 돌리므로 너그럽고 담담하다. 비록 빈천하더라도, 만약 부귀를 도랑을 파고 땔나무를 베는 것처럼 하여 힘쓰는 노력을 더하고 굳센 기세를 다하게 한다면, 파기를 쉬지 않으면 도랑이 깊어지고 도끼질을 그치지 않으면 땔나무가 많아지듯, 명이 없는 사람도 모두 원하는 바를 얻을 것이니 어찌 빈천하고 흉하고 위태로운 우환이 있겠는가? 그러나 혹은 도랑이 아직 통하지 않았는데 장마를 만나고, 땔나무가 아직 많지 않은데 범을 만난다. 벼슬살이에서 귀해지지 못하고 재산 경영에서 부유해지지 못하는 것은 도랑을 파다가 장마를 만나고 땔나무를 베다가 범을 만나는 부류이다.
재능이 있어도 베풀지 못하고 지혜가 있어도 행하지 못하며, 혹은 베풀어도 공이 서지 않고 혹은 행하여도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비록 재능과 지혜가 공자 같더라도 오히려 이루어 세운 공이 없다. 세속은 사람의 절개와 행실이 높은 것을 보면 “어질고 명철함이 이와 같은데 어찌 귀하지 않은가?” 하고, 사람의 계책과 사려가 깊은 것을 보면 “변론과 지혜가 이와 같은데 어찌 부유하지 않은가?” 한다. 귀함과 부유함에는 명(命)(福)록(祿)이 있으니, 어질고 명철함과 변론하고 지혜로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부는 계책으로 얻을 수 없고, 귀는 재능으로 이룰 수 없다.” 하였다. 지혜와 사려가 깊어도 재물이 없고, 재능이 높아도 관직이 없다. 은인(銀印)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두른 이가 반드시 직(稷)·설(契)의 재능을 가진 것은 아니고, 금을 쌓고 옥을 포갠 이가 반드시 도주공(陶朱公)의 지혜를 가진 것은 아니다. 혹은 때로 하우(下愚)이면서 천금을 가지고, 완고하고 둔하면서 성(城)을 다스린다. 그러므로 관직을 맡은 이가 재능이 같아도 그 귀함은 명이 다르고, 생업을 다스리는 이가 지혜가 같아도 그 부유함은 녹이 다르다. 녹명(祿命)에는 빈부가 있으니 지혜로 늘리거나 줄일 수 없고, 성명(性命)에는 귀천이 있으니 재능으로 올리거나 내릴 수 없다. 성왕(成王)의 재능은 주공만 못하고 환공(桓公)의 지혜는 관중(管仲)만 못하였으나, 성왕과 환공은 존귀한 명을 받았고 주공과 관중은 낮은 품계를 받았다. 살펴보건대 옛날 군주는 신하에게 배우지 않은 이가 드물고, 지혜가 넓은 이는 [군주의] 스승이 되지 않은 이가 드물다. 그런데도 군주는 오히려 무능하면서 군주의 자리에 처하고, 신하는 오히려 큰 재능을 가지고도 심부름꾼이 된다. 그러므로 귀천은 명에 있지 지혜와 어리석음에 있지 않고, 빈부는 녹에 있지 완고함과 지혜로움에 있지 않다. 세상의 일을 논하는 자는 재능이 높으면 마땅히 장상(將相)이 되어야 하고 능력이 낮으면 마땅히 농부나 상인이 되어야 한다고 여겨, 지혜와 능력이 있는 선비가 관위에 이르지 못한 것을 보면 괴이하게 여겨 헐뜯기를 “이는 반드시 행실과 조행에서 훼손되었을 것이다.” 하고, 행실과 조행이 있는 선비 또한 괴이하게 여겨 헐뜯기를 “이는 반드시 재능과 지혜가 부족할 것이다.” 한다. 재능과 지혜, 행실과 조행이 비록 높더라도 관위와 부록(富祿)에는 명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한다. 재능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길하고 성대한 때에 일을 일으켜 복이 이르면 사람들은 재능과 지혜가 밝고 살폈다고 하고, 흉하고 쇠할 때 화가 오면 어리석고 어둡다고 한다. [이는] 길흉의 명이요 성쇠의 녹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백규(白圭)와 자공(子貢)은 재화를 굴려 부를 이루고 금옥을 쌓았는데, 사람들은 술(術)이 좋고 배움이 밝았다고 한다. 주보언(主父偃)은 제(齊)에서 욕을 당하고 천대받아 배척되어 쓰이지 못하였으나, 궁궐에 나아가 상소를 올려 마침내 한(漢)에 쓰여 관직이 제상(齊相)에 이르렀고, 조(趙)나라 사람 서악(徐樂) 또한 글을 올려 주보언의 상소와 때를 같이하였는데, 황제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불러 낭(郎)에 임명하였다. 사람들은 주보언의 재능과 서악의 지혜 때문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유자(儒者)가 한 경전을 밝게 해설하여 경사(京師)에서 익히는데, 밝기가 광치규(匡稚圭) 같고 깊기가 (趙)[鮑]자도(子都) 같아 처음에 갑을과(甲乙科)에 올라 낭(郎)·박사(博士)로 옮겨 가니, 사람들은 경전에 밝고 재능이 높아서 얻은 것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그리고 범저(范雎)가 진(秦)(明)[昭]왕에게 유세하여 응후(應侯)에 봉해지고, 채택(蔡澤)이 범저에게 유세하여 객경(客卿)에 임명된 것 같은 경우를, 사람들은 범저와 채택의 훌륭함 때문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모두 명록(命祿)이 귀하고 부유하며 좋은 것이 이르는 때였던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죽고 삶은 명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있다.” 하였다.
노평공(魯平公)이 맹자(孟子)를 만나고자 하였는데, 총애받는 신하 장창(臧倉)이 맹자를 헐뜯어 그만두었다.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이다!” 하였다. 공자는 성인이고 맹자는 어진 이로서, 사람들에게 도에 편안하기를 가르치고 옳고 그름을 잃지 않았으니, 명을 일컬어 말한 것은 명이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회남서(淮南書)』에 이르기를 “어짊과 비루함은 때에 있지 행실에 있지 않고, 이로움과 해로움은 명에 있지 지혜에 있지 않다.” 하였다. 가생(賈生)이 말하기를 “하늘은 더불어 기약할 수 없고, 도는 더불어 도모할 수 없다 . 더디고 빠름에는 명이 있으니 어찌 그 때를 알겠는가?” 하였다. 고조(高祖)가 경포(黥布)를 칠 때 날아온 화살에 맞아 병이 심하였다. 여후(呂后)가 좋은 의원을 맞아들였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고칠 수 있습니다.” 하였다. 고조가 그를 꾸짖어 말하기를 “나는 베옷 입은 몸으로 세 자 칼을 들고 천하를 취하였으니, 이것이 천명이 아니겠는가! 명은 곧 하늘에 있으니 비록 편작(扁鵲)인들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하였다. 한신(韓信)이 황제와 병법을 논할 때 고조에게 말하기를 “폐하는 이른바 하늘이 내려 준 것이지, 지혜와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양자운(揚子雲)이 말하기를 “만나고 만나지 못함은 명이다.” 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부귀는 빈천을 벗어나지 않고, 빈천은 부귀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이는 부귀로부터 빈천이 되고, 빈천으로부터 부귀가 됨을 이른다. 부귀한 이는 빈천해지고자 하지 않으나 빈천이 저절로 이르고, 빈천한 이는 부귀해지기를 구하지 않으나 부귀를 저절로 얻는다. 봄과 여름에 [금(金)이] 수(囚)·사(死)하고 가을과 겨울에 왕(王)·상(相)하는 것은 [그것이] 할 수 있어서가 아니며, 해가 아침에 나오고 저녁에 들어가는 것은 구해서가 아니니, 천도(天道)가 자연히 그러한 것이다. 대왕(代王)이 대(代)로부터 들어와 문제(文帝)가 되었고, 주아부(周亞夫)가 서자로서 조후(條侯)가 되었다. 이때 대왕은 태자가 아니었고 주아부는 적자가 아니었으나, 때를 만나고 기회를 만나 우뚝하게 갑자기 이르렀다. 명이 가난한데 힘써 부지런하여 부를 이루면 부가 이르자 죽고, 명이 천한데 재능으로 귀함을 취하면 귀함이 이르자 면직된다. 재능과 힘으로 부귀를 이루어도 명록(命祿)이 받들어 지킬 수 없으니, 그릇이 용량을 채우고 손이 무거운 것을 드는 것과 같다. 그릇이 한 되를 받는데 한 되로 하면 평평하고, 받는 것이 한 되를 넘으면 가득 차 넘친다. 손이 한 균(鈞)을 드는데 한 균으로 하면 평안하고, 드는 것이 한 균을 넘으면 넘어져 엎어진다. 전대(前代)에 시비에 밝은 이들이 이를 명에 돌렸으니, 명이 확실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명을 믿는 자는 숨어 살며 때를 기다릴 수 있으니, 정신을 수고롭게 하고 몸을 괴롭혀 구하고 찾을 필요가 없다. 마치 구슬과 옥이 산과 못에 있는 것과 같은데, 천명은 알기 어렵고 사람은 살필 수 없어서, 비록 두터운 명이 있어도 오히려 스스로 믿지 못하므로 반드시 그것을 구한다. 만약 스스로 안다면 비록 부를 피해 달아나고 귀를 피하더라도 끝내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힘은 가난을 이기고, 삼감은 화를 이긴다.” 하였다. 힘써 일에 부지런하여 부를 이루고, 재능을 연마하고 조행을 밝혀 귀를 취한다. 때를 버리고 일을 잃으면서 부귀를 바라는 것은 얻을 수 없다. 비록 명이 있다고 말하더라도 마땅히 구해야 한다. 만약 명을 믿고 구하지 않으면서 마땅히 저절로 이를 것이라 한다면, 빌리지 않아도 저절로 얻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며, 가지 않아도 저절로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명이 부유한 사람은 근력이 저절로 강하고, 명이 귀한 사람은 재능과 지혜가 저절로 높으니, 천리마가 머리·눈·발굽·다리가 저절로 서로 걸맞은 것과 같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자는 있으나, 반드시 구하지 않고 얻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밀히 배우고 귀를 구하지 않아도 귀가 저절로 이르고, 힘써 일하고 부를 구하지 않아도 부가 저절로 이른다. 부귀의 복은 구하여 이룰 수 없고, 빈천의 화는 구차히 제거할 수 없다. 이로써 말하면 부귀의 명이 있으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는다.
명을 믿는 자가 말하기를 “스스로 길함을 알면 구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천명이 길하고 두터우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고, 천명이 흉하고 두터우면 구하여도 보탬이 없다.” 하였다. 사물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겨난다면, 사람에게도 귀함을 구하지 않았는데 귀해진 자가 있다. 사람의 정(情)에는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선한 자가 있고, 가르쳐도 끝내 선하지 않은 자가 있으니, 천성은 명과 같다. 월왕(越王) 예(翳)가 산속으로 도망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왕위를] 원하지 않았다. 스스로 [다른 이가] 대신 [즉위하기를] 바랐다. 월나라 사람이 그 굴에 연기를 피워 마침내 면하지 못하고 억지로 세워져 군주가 되었다. 천명이 마땅히 그러하면 비록 도망하여 피하더라도 끝내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는 귀함이로다!
무릇 사람이 받은 명에는 두 품(品)이 있으니, 첫째는 마땅히 부딪쳐 만나는 명이고, 둘째는 강약·수요(壽夭)의 명이다. 마땅히 부딪쳐 만난다는 것은 병화(兵火)·화재·압사·익사를 이른다. 강하여 오래 살고 약하여 일찍 죽는다는 것은 받은 기(氣)의 두텁고 얇음을 이른다. 병화·화재·압사·익사를 만나는 것은 받은 바로 명을 삼으나 반드시 확실한 기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강약·요수로 말하면 백(百)을 수로 삼으니, 백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기가 스스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받은 기가 두터우면 그 몸이 강하고, 몸이 강하면 그 명이 길며, 기가 얇으면 그 몸이 약하고, 몸이 약하면 명이 짧다. 명이 짧으면 병이 많고 수명이 짧다. 처음 태어나서 죽고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상하는 것은 받은 것이 얇고 약하기 때문이다. 두텁고 강한 사람이 그 수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 만약 만난 [재난이] 없는데도 헛되이 머물며 곤궁하고 쇠약하여 기가 짧아져 죽는다면, 이는 받은 것이 얇고 쓰는 것이 다한 것이다. 이는 처음 태어나서 죽고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상하는 것과 같은 명이다. 모두 받은 기가 부족함에 말미암아 스스로 백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사람이 받은 기는 혹은 충실하여 굳세고 강하며, 혹은 허약하고 열등하여 무르고 약하다. 충실하고 굳세면 오래 살고, 허약하고 무르면 그 몸을 잃는다. 천지가 사물을 낳으나 사물에는 [끝까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낳으나 자식에는 성취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사물 가운데 열매가 되었다가 말라 죽어 떨어지는 것이 있다. 사람 가운데 아이가 되었다가 명이 짧아 상하는 이가 있다. 만약 열매가 마르지 않는다면 또한 만 한 해에 이르고, 만약 아이가 상하지 않는다면 또한 백 년에 이른다. 그러나 열매와 아이가 되어 말라 죽는 것은 받은 기가 얇기 때문이니, 비록 형체가 온전하여도 허약하고 기가 적어 채울 수 없다. 아이가 태어날 때 울음소리가 크고 밝으며 높고 시원하면 오래 살고, 쉬고 탁하며 낮으면 일찍 죽는다. 어째서인가? 수요의 명을 받음은 기의 많고 적음을 주된 성(性)으로 삼기 때문이다. 부인이 드물게 낳으면 자식이 살고, 자주 낳으면 자식이 죽는다. 어째서인가? 드물면 기가 두터워 자식이 굳세고 강하며, 자주 하면 기가 얇아 자식이 무르고 약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가졌는데 앞서 이미 낳은 자식이 죽었으면, 품은 아이가 살지 못한다고 한다. 이를 이름하여 ‘회(懷)’라 하니, 그 뜻은 이미 낳은 자식이 죽었으므로 감응하여 상한 자식이 그 본성을 잃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낳은 자식이 죽고 품은 자식이 흉한 것은 낳고 젖먹이기가 잦아 기가 얇아서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의 형체를 이루었어도 쉽게 감응하여 상하고, 홀로 먼저 병들며 병이 홀로 낫지 않는다.
백 세의 명이 그 바른 것이다. 백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비록 바르지는 않으나 오히려 명이다. 비유하면 사람의 형체가 한 장(丈)인 것이 바른 형체인 것과 같다. 남자를 이름하여 장부(丈夫)라 하고, 공(公)과 할미를 높여 장인(丈人)이라 한다. 한 장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그 바름을 잃은 것이다. 비록 그 바름을 잃었으나 오히려 형체이다. 형체를 한 장을 채우지 못한다는 까닭으로 형체가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명도 백을 채우지 못한다는 까닭으로 명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하늘에 길고 짧은 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각기 받은 바가 있는 것이다. 이로써 말하면 사람은 하늘에서 기와 명을 받으니, [수명을] 마치든 마치지 못하든 같은 것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왕업을 도모하다 이루지 못하면 그 폐단으로 패자가 될 수 있다.” 하였다. 패자는 왕자의 폐단이다. 패자는 본래 마땅히 왕자에 이르러야 하니, 수명이 마땅히 백에 이르러야 하는 것과 같다. 왕업을 이루지 못하면 물러나 패자가 된다. 백에 이르지 못하면 줄어들어 요절이 된다. 왕과 패는 같은 한 가지 업이나 우열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수와 요는 혹 한 가지 기이나 길고 짧음에 따라 수가 다르다. 어떻게 백을 채우지 못함이 요절임을 아는가? 백 세의 명이니, 그 형체의 크고 작음과 길고 짧음이 같은 등급이기 때문이다. 백 세의 몸과 오십 세의 몸은 다를 바가 없다. 신체가 다르지 않으니 혈기도 다르지 않다. 새와 짐승은 사람과 형체가 다르므로 그 수명도 사람과 수가 다르다.
무엇으로 사람의 나이가 백을 수로 삼음을 밝히는가? 세상에 [그런 예가] 있다. 유자가 말하기를 “태평한 때에는 백성이 크고 장대하여 백 세 안팎을 사니, 기가 조화로운 데서 생긴 것이다.” 하였다. 「요전(堯典)」에 이르기를 “짐이 재위한 지 칠십 년에 선양할 이를 구하여 순을 얻었다.” 하였다. 순은 부름을 받아 삼십 년을 재위하였다. 요는 물러나 늙어 팔 년 만에 죽었으니, 붕어함에 이르러 구십팔 세였다. 아직 재위하기 전에 반드시 이미 성인이었을 것이니, 지금 계산하면 백여 세이다. 또 이르기를 “순은 나서 삼십 년, 부름을 받아 쓰인 지 삼십 년, 재위 오십 년에 남방을 순수하다가 이내 죽었다.” 하였다. 꼭 백 세이다.
문왕이 무왕에게 말하기를 “나는 백 세이고 너는 구십 세이다. 내가 너에게 셋을 준다.” 하였다. 문왕은 구십칠 세에 훙(薨)하였고, 무왕은 구십삼 세에 붕(崩)하였다. 주공은 무왕의 아우이니 형제의 차이는 십 년을 넘지 않는다. 무왕이 붕어하자 주공이 섭정한 지 칠 년에 정사를 돌려주고 물러나 늙었으니, 백 세 안팎이었다. 소공(邵公)은 주공의 형인데 강왕(康王) 때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태보(太保)였으니, 백여 세 안팎이었다. 성인은 조화로운 기를 받았으므로 수명이 바른 수를 얻었다. 기가 조화로우면 다스림이 평안하므로 태평한 세상에는 장수하는 사람이 많다. 백 세의 수명은 대개 사람 나이의 바른 수이니, 사물이 가을에 이르러 죽는 것이 사물 명의 바른 기한인 것과 같다. 사물이 가을보다 먼저 [죽거나] 가을보다 뒤에 [죽는] 것은, 또한 사람이 죽을 때 혹 백 세를 넘기거나 혹 백 세에 못 미치는 것과 같다. 가을보다 먼저와 뒤를 기한으로 삼고, 백을 넘김과 모자람을 수로 삼는다. 사물이 혹 땅에서 나오자마자 죽는 것은 사람이 처음 태어나서 요절하는 것과 같다. 사물이 혹 가을을 넘기고도 죽지 않는 것은 또한 사람의 나이가 백을 많이 넘어 삼백에 이르는 것과 같다. 전(傳)에 일컫기를 노자(老子)는 이백여 세, 소공은 백팔십 세, 고종(高宗)은 나라를 누린 지 백 년, 주목왕(周穆王)은 나라를 누린 지 백 년이라 하였다. 아울러 나라를 누리기 전의 [나이를 더하면] 모두 백삼십·사십 세를 넘는다.
무릇 사람의 조행에는 어짊과 어리석음이 있고, 화복을 만남에는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다. 일을 일으킴에는 옳음과 그름이 있고, 상벌에 부딪침에는 우(偶)와 불우(不偶)가 있다. 같은 때에 병란을 만나도 숨은 자는 맞지 않는다. 같은 날에 서리를 맞아도 가려진 것은 상하지 않는다. 맞아 상한 것이 반드시 악한 것은 아니고, 숨고 가려진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 숨고 가려진 것은 다행이고, 맞아 상한 것은 불행이다. 함께 충성을 바치고자 하여도 혹은 상을 받고 혹은 벌을 받으며, 함께 보탬이 되고자 하여도 혹은 믿음을 받고 혹은 의심을 받는다. 상을 받고 믿음을 받는 자가 반드시 참된 것은 아니고, 벌을 받고 의심을 받는 자가 반드시 거짓된 것은 아니다. 상을 받고 믿음을 받는 자는 우연히 맞은 것[偶]이고, 벌을 받고 의심을 받는 자는 맞지 않은 것[不偶]이다.
공자의 문도는 칠십여 명이었는데, 안회가 일찍 요절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다!” 하였다. 명이 짧은 것을 불행이라 일컬었으니, 명이 긴 자는 다행이고 명이 짧은 자는 불행임을 알 수 있다. 성현의 도를 따르고 인의의 업을 강론하였으니 마땅히 복과 도움을 입어야 한다. 백우(伯牛)가 병이 든 것도 또한 안회의 부류이니, 모두 불행이다. 땅강아지와 개미가 땅 위를 다니는데 사람이 발을 들어 밟고 지나간다. 발이 밟은 곳의 땅강아지와 개미는 죽고, 발이 밟지 않은 곳의 것은 온전히 살아 상하지 않는다. 불이 들풀을 태우는데 수레바퀴가 지나간 곳은 [타지 않으니], 불이 태우지 않은 풀을 세속에서 혹 기뻐하여 이름하여 ‘행초(幸草)’라 한다. 발이 밟지 않고 불이 미치지 않은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 [발이] 들리고 불이 지나감에 우연히 그러한 것이 있을 뿐이다. 이로써 논하면 옹저(癰疽)가 생기는 것도 또한 같은 실상이다. 기가 맺히고 막혀 쌓이면 모여서 옹(癰)이 되고, 터지면 저(疽)의 상처가 되어 피가 흐르고 고름이 나오니, 어찌 옹저가 생긴 곳이 몸의 좋은 혈(穴)이겠는가? 영위(營衛)의 운행이 그곳에서 통하지 못함을 만났을 뿐이다. 거미가 그물을 치면 날벌레가 지나가다 혹은 벗어나고 혹은 잡힌다. 사냥꾼이 그물을 펼치면 온갖 짐승이 떼 지어 소란하여 혹은 잡히고 혹은 놓친다. 어부가 강과 하천의 물고기를 그물질하면 혹은 남고 혹은 없어진다. 혹은 간악한 도적질로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도 알려지지 않고, 혹은 속죄금을 물 작은 죄로도 발각된다. 재앙의 기가 사람에게 가해지는 것도 이런 부류이다. 불행한 자는 [재앙을] 만나 부딪쳐 죽고 다행한 자는 벗어나 사니, 불행이란 요행을 얻지 못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삶은 곧음[直]이니, 곧음 없이 사는 것은 요행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도를 따르다가 [재앙에] 부딪친 자는 불행이 된다. 무너질 담 아래 섰다가 무너진 것에 깔리고, 언덕 위를 밟다가 무너져 떨어지는 것은, 가볍게 까닭 없이 만난 것이므로 불행이 된다. 노(魯)나라 성문이 오래 썩어 무너지려 하였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날 때 종종걸음으로 빨리 지나갔다. 좌우가 말하기를 “오래되었습니다.”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그 오래됨을 싫어한다.” 하였다. 공자는 경계하고 삼감이 매우 심하였으니, 만약 지나가다 무너짐을 만났다면 불행이라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불행은 있어도 요행은 없고, 소인은 요행은 있어도 불행은 없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자는 평이한 데 처하여 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험한 것을 행하여 요행을 바란다.” 하였다.
영행(佞幸)의 무리, 굉[유](閎[孺])·적유(籍孺)의 무리는 덕이 없고 재능이 얇으나 용색으로 사랑받아, 사랑받아서는 안 되는데 총애를 받고 친해서는 안 되는데 가까이 붙었으니, 도리의 마땅함이 아니다. 그러므로 태사공이 그들을 위해 전(傳)을 지었으니, 사악한 사람이 도에 어긋나면서 은총을 받는 것이 이와 같은 부류이므로 그 이름을 합하여 영행이라 하였다. 덕이 없이 은혜를 받고 허물이 없이 화를 만나는 것은 같은 실상이다. 함께 원기(元氣)를 받았으나 혹은 홀로 사람이 되고 혹은 금수가 되며, 함께 사람이 되었으나 혹은 귀하고 혹은 천하며 혹은 가난하고 혹은 부유하다. 부유한 자는 혹 금을 쌓고 가난한 자는 혹 밥을 빌며, 귀한 자는 제후에 봉해지고 천한 자는 노복에 이르니, 하늘이 받아 베풂에 좌우[의 편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이 받은 성(性)에 두텁고 얇음이 있는 것이다. 함께 도덕을 행하여도 화복이 고르지 않고, 함께 인의를 행하여도 이해가 같지 않다. 진문공(晉文公)은 문덕(文德)을 닦고 서언왕(徐偃王)은 인의를 행하였는데, 문공은 [그로써] 상을 받았고 언왕은 [그로써] 격파되어 멸망하였다.
노나라 사람이 아버지를 위해 원수를 갚고 편안히 걸으며 달아나지 않자 쫓는 자가 그를 놓아주었고, 우결(牛缺)은 도적에게 빼앗기고도 마음이 온화하여 두려워하지 않자 도적이 돌아와 그를 죽였다. 문덕과 인의는 같고, 달아나지 않음과 두려워하지 않음은 대등한데, 문공과 노나라 사람은 복을 얻고 언왕과 우결은 화를 얻은 것은, 문공과 노나라 사람은 다행이고 언왕과 우결은 불행이었기 때문이다. 한소후(韓昭侯)가 취하여 누워 추웠는데, 전관(典冠)이 그에게 옷을 덮어 주었다. 깨어나 그에 대해 묻고 전관이 자기를 아낌을 알았으나, 직분을 넘었다는 까닭으로 그에게 죄를 주었다. 위(衛)나라의 참승(驂乘)은 마부의 잘못을 보고 뒤에서 수레를 [멈추라고] 소리쳤는데, 위험을 구하는 의리가 있어 그 죄를 입지 않았다. 참승이 수레를 소리쳐 [멈춘 것과] 전관이 옷을 덮어 준 것은 같은 뜻이다. 옷을 덮어 준 것은 군주가 추울까 두려워해서이고, 수레를 소리쳐 [멈춘 것은] 군주가 위태로울까 두려워해서이니, 어질고 은혜로운 정이 모두 마음에서 나왔다. 그런데도 한나라에서는 죄가 되고 위나라에서는 충성이 되었으니, 참승은 우(偶)하고 전관은 불우(不偶)한 것이다.
사람의 행실뿐 아니라 사물에도 이런 것이 있다. 길이가 여러 길[仞]인 대나무와 크기가 여러 아름인 나무를 공인이 재단하여 쓰는데, 혹은 그릇을 이루어 들려 쓰이고 혹은 남은 재목이 되어 버려진다. 공인에게 사랑과 미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칼과 도끼[의 쓰임]에 우연함이 있는 것이다. 곡식을 쪄서 밥을 짓고 밥을 빚어 술을 만든다. 술이 이루어짐에 달고 씀이 맛이 다르고, 밥이 익음에 되고 무름이 조화가 다르다. 요리사와 술 빚는 이의 뜻이 다른 것이 아니라 손가락의 조절에 우연히 맞음이 있는 것이다. 밥을 지어 다른 광주리에 두고 단술을 다른 그릇에 두었는데, 벌레가 한 그릇에 떨어지면 술을 버리고 마시지 않으며, 쥐가 한 광주리를 지나가면 밥을 버리고 먹지 않는다. 온갖 풀의 부류는 모두 보탬이 있으나, 의원에게 채취되면 좋은 약이 되고, 혹은 마른 못에 버려져 불에 녹는다. 같은 금이라도 혹은 칼과 창이 되고 혹은 칼끝이 된다. 같은 나무라도 혹은 궁궐의 대들보가 되고 혹은 다리의 기둥이 된다. 같은 불이라도 혹은 기름 초를 녹이고 혹은 마른 풀을 태운다. 같은 흙이라도 혹은 전당의 기초가 되고 혹은 창과 문에 발라진다. 같은 물이라도 혹은 솥을 씻고 혹은 썩은 냄새를 씻어 낸다. 사물의 좋고 나쁨은 같으나 사람에게 쓰임을 만남에 있어 그 불행과 불우함이 오히려 애통할 만한데, 하물며 정기(精氣)를 머금은 무리이겠는가! 우순(虞舜)은 성인이니 세상에 있으면서 마땅히 온전하고 편안한 복을 입어야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완고하고 어머니는 [사나우며] 아우 상(象)은 오만하고 광포하여, 허물이 없는데 미움을 받고 악하지 않은데 죄를 얻었으니, 불행이 심하였다. 공자는 순의 다음 [가는 성인]이다. 살아서 한 자의 땅도 없었고, 두루 다니며 초빙에 응하였으나 자취가 깎이고 양식이 끊겼다. 모두 성인의 재능으로 함께 불행하고 불우하였다. 순은 그래도 요를 만나 선양을 받았으나, 공자는 결국 궐리(闕里)에서 죽었다. 성인의 재능으로도 오히려 불행하고 불우하였으니, 용렬한 사람 가운데 불행과 불우를 입은 자는 화가 반드시 많을 것이다.
묵가(墨家)의 논은 사람의 죽음에 명이 없다고 여기고, 유가(儒家)의 의론은 사람의 죽음에 명이 있다고 여긴다. 명이 있다고 말하는 자는 자하(子夏)가 “죽고 삶은 명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있다.”라고 한 말을 보았다. 명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역양(歷陽)의 도읍이 하룻밤 사이에 가라앉아 호수가 되었다는 것을 들었고, 진(秦)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장평(長平) 아래에서 조(趙)나라의 항복한 병졸을 구덩이에 묻어 사십만 명이 동시에 모두 죽었다는 것, 춘추 시대에 패배한 군대에서 죽은 자가 풀을 덮고 시신이 만을 헤아렸다는 것, 기근이 든 해에 굶주린 자가 길에 가득하고 온기(溫氣)의 역병으로 천 가구가 멸문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만약 반드시 명이 있다면 어찌 그 [명이] 진·제(齊)처럼 [한결같이] 같겠는가?
명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말하기를 “천하의 넓음과 백성의 많음에 비하면, 하나의 역양 도읍과 하나의 장평 구덩이에서 명이 같아 함께 죽은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 된다. 명이 마땅히 빠져 죽을 자였으므로 역양에 서로 모였고, 명이 마땅히 깔려 죽을 자였으므로 장평에 서로 쌓였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고조가 처음 일어났을 때 관상가가 풍(丰)·패(沛)의 고장에 들어가니 제후에 봉해질 사람이 많았던 것과 같으나, 반드시 늙은이·젊은이·남자·여자가 모두 귀하여 [귀한] 상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뛰어난 것이 때로 나타나는 것은 왕왕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역양의 도읍에서 남녀가 모두 빠지고 장평의 구덩이에서 노소가 함께 묻혔으니, 만(萬)을 헤아리는 가운데 반드시 명이 길어 아직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때가 쇠미함을 만나 병란이 함께 일어나 그 수명을 마치지 못하였다. 사람의 명에는 길고 짧음이 있고 때에는 성하고 쇠함이 있으니, 쇠하면 병들고 재앙을 입고 화를 당하는 것이 그 징험이다.” 하였다.
송(宋)·위(衛)·진(陳)·정(鄭)이 같은 날 함께 화재를 입었는데, 네 나라 백성 가운데에는 반드시 녹(祿)이 성하여 아직 쇠할 때가 아닌 사람이 있었을 것이나 모두 멸하였으니, 나라의 화가 그들을 덮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라의 명(命)이 사람의 명을 이기고, 수명(壽命)이 녹명(祿命)을 이긴다. 사람에게는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상(相)이 있고, 또 가난하고 부유하며 귀하고 천한 법(法)이 있어, 모두 몸에 드러난다. 그러므로 수명의 길고 짧음은 모두 하늘에서 받고, 골법(骨法)의 좋고 나쁨은 모두 몸에 드러난다. 명이 요절할 운이면 비록 뛰어난 행실을 타고났더라도 끝내 오래 살 수 없고, 녹이 가난하고 천할 운이면 비록 착한 성품이 있더라도 끝내 뜻을 이룰 수 없다. 항우(項羽)가 죽으려 할 때 그 무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패한 것은 곧 명이지 용병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사실이다. 사실이란, 항우의 용병은 고조(高祖)보다 뛰어났으나 고조가 일어난 데에는 천명(天命)이 있었다는 것이다. 나라의 명은 뭇 별에 매여 있어, 늘어선 별자리의 길흉에 따라 나라에 화복이 있고, 뭇 별이 옮겨 감에 따라 사람에게 성쇠가 있다. 사람에게 길흉이 있는 것은 해에 풍년과 흉년이 있는 것과 같다. 명에는 쇠함과 성함이 있고, 물건에는 귀함과 천함이 있다. 한 해 가운데에도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하며, 한평생 사이에도 한 번 쇠하고 한 번 성한다. 물건의 귀천은 풍년과 흉년에 달려 있지 않고, 사람의 성쇠는 어짊과 어리석음에 달려 있지 않다. 자하(子夏)가 「죽고 사는 것은 명에 있고, 부귀는 하늘에 있다」라고 하고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있고, 부귀는 명에 있다」라고 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상(象)이 없고 성(性)을 주로 하니, 굳세고 강한 성을 받으면 기(氣)가 두텁고 몸이 굳세며, 굳세면 수명이 길고, 수명이 길면 요절하지 않는다. 연약한 성을 받은 자는 기가 적고 엷으며 성이 약하고 이지러지니, 약하고 이지러지면 수명이 짧고, 짧으면 일찍 죽는다. 그러므로 명에 있다고 말하니, 명이 곧 성이다. 부귀를 받는 것으로 말하면, 성을 받는 기와 같아서 뭇 별의 정기를 얻는 것이다. 뭇 별은 하늘에 있고, 하늘에는 그 상이 있다. 부귀의 상을 얻으면 부귀하고, 빈천의 상을 얻으면 빈천하므로, 하늘에 있다고 한다. 하늘에 있다는 것은 어떠한가? 하늘에는 백관(百官)이 있고 뭇 별이 있다. 하늘이 기를 베풀면 뭇 별은 정기를 펼치니, 하늘이 베푸는 기 가운데 뭇 별의 기가 들어 있다. 사람은 기를 받아 태어나고 기를 머금어 자라니, 귀함을 얻으면 귀하고 천함을 얻으면 천하다. 귀함에도 혹 품계에 높고 낮음이 있고, 부유함에도 혹 재물에 많고 적음이 있는 것은, 모두 별자리의 존비(尊卑)·대소(大小)가 준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백관이 있고 하늘에 뭇 별이 있으며, 땅에는 만민이 있으니 오제(五帝)·삼왕(三王)의 정기이다. 하늘에 왕량(王梁)·조보(造父)[별]가 있고 사람에게도 그들이 있으니, 그 기를 받았으므로 말 부리기에 능하다.
전(傳)에 이르기를 「명을 말함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정명(正命), 둘째는 수명(隨命), 셋째는 조명(遭命)이다」라고 하였다. 정명은 본래 타고난 것에서 저절로 길함을 얻는 것을 말한다. 성이 그러하고 골상이 좋으므로 행실을 닦아 복을 구하지 않아도 길함이 저절로 이르니, 그러므로 정명이라 한다. 수명은 힘써 행실을 닦으면 길한 복이 이르고, 정을 멋대로 하고 욕심을 부리면 흉한 화가 이르는 것이니, 그러므로 수명이라 한다. 조명은 선을 행하였는데 악을 얻는 것으로, 바라던 바가 아닌데 밖에서 만나 흉한 화를 얻는 것이니, 그러므로 조명이라 한다. 무릇 사람이 명을 받는 것은 부모가 기를 베풀 때에 이미 길흉을 얻는다. 무릇 성과 명은 다르니, 혹 성은 착한데 명은 흉하고, 혹 성은 악한데 명은 길하다.
행실의 선악은 성이고, 화복길흉은 명이다. 혹 선을 행하였는데 화를 얻으니 이는 성은 착하나 명이 흉한 것이고, 혹 악을 행하였는데 복을 얻으니 이는 성은 악하나 명이 길한 것이다. 성에는 본래 선악이 있고, 명에는 본래 길흉이 있다. 가령 명이 길한 사람은 비록 선을 행하지 않아도 반드시 복이 없는 것은 아니고, 흉한 명의 사람은 비록 힘써 행실을 닦아도 반드시 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구하는 데에는 도가 있고, 얻는 데에는 명이 있다」라고 하였다. 성이 착해야 구할 수 있고, 명이 좋아야 얻을 수 있다. 성은 착하나 명이 흉하면 구해도 얻을 수 없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화가 따라 이른다[는 것이 수명의 설이다]. 그런데 도척(盜蹠)과 장교(莊蹻)는 천하를 휘젓고 다니며 무리 수천을 모아 남의 물건을 빼앗고 사람의 몸을 베었으니 무도함이 심하여 마땅히 화를 만나야 했으나, 도리어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이와 같다면 수명의 설은 어디에서 증험되겠는가? 조명이란 안으로 선을 행하였는데 밖에서 흉을 만나는 것이다. 안연(顏淵)·백우(伯牛)의 무리 같은 이는 어찌하여 흉을 만났는가? 안연과 백우는 선을 행한 자들이니 마땅히 수명을 얻어 복과 도움이 따라 이르러야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흉을 만났는가? 안연은 배움에 지쳐 재주 때문에 스스로를 죽였고, 백우는 한가로이 지내다가 몹쓸 병을 만났다. 굴평(屈平)·오원(伍員)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충성을 다해 윗사람을 보필하고 왕의 신하 된 절개를 다하였으나, 초(楚)는 그 몸을 추방하였고 오(吳)는 그 시신을 삶았다. 선을 행하였으니 마땅히 수명의 복을 얻어야 하는데 도리어 조명의 화에 부딪힌 것은 어째서인가? 수명을 말하면 조명이 없고, 조명을 말하면 수명이 없으니, 유자(儒者)의 삼명(三命)의 설은 결국 어디에 정해지는가? 또 명은 처음 태어날 때에 있어 골상의 겉에 드러난다. 지금 행실에 따라 이른다고 말하면 이는 명이 끝에 있고 근본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부귀빈천은 모두 처음 받을 때에 있지, 자란 뒤에 행실에 따라 이르는 것이 아니다. 정명인 자는 백 세에 이르러 죽고, 수명인 자는 오십 세에 죽으며, 조명인 자는 처음 기를 받을 때에 흉악함을 만난 것이니, 임신했을 때 나쁜 것을 만나거나, 혹 천둥과 비의 변고를 만나 자라서 요절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삼명이라 한다.
또한 세 가지 성(性)이 있으니, 정(正)이 있고 수(隨)가 있고 조(遭)가 있다. 정이란 오상(五常)의 성을 받은 것이고, 수란 부모의 성을 따른 것이며, 조란 나쁜 물상(物象)을 만난 까닭이다. 그러므로 임부가 토끼를 먹으면 아이가 언청이로 태어난다. 「월령(月令)」에 이르기를 「이달에 천둥이 소리를 내려 한다」라고 하였다. 그 몸가짐을 삼가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낳은 아이가 온전하지 못하여 반드시 큰 흉이 있으니, 벙어리·귀머거리·절름발이·소경이 된다. 기가 태를 상하게 하는 것을 만났으므로 미치고 패악한 성을 받는다. 양설사아(羊舌似我)는 처음 태어났을 때 소리가 승냥이와 이리 같았는데, 자라서 성이 악하여 화를 입고 죽었다. 어머니 몸에 있을 때 이 성을 받은 것이니, 단주(丹朱)·상균(商均)의 부류가 이것이다. 성과 명은 근본에 있으므로 『예(禮)』에 태교(胎敎)의 법이 있으니, 아이가 몸에 있을 때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고, 자른 것이 바르지 않으면 먹지 않으며, 바른 색이 아니면 눈으로 보지 않고, 바른 소리가 아니면 귀로 듣지 않는다.
자라서는 어진 스승과 좋은 사부를 두어 군신·부자의 도를 가르치니,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이때에 달려 있다. 기를 받을 때 어머니가 삼가지 않아 마음이 망령되고 생각이 삿되면, 아이가 자라서 미치고 패악하여 착하지 않으며 형체가 추악하다. 소녀(素女)가 황제(黃帝)에게 오녀(五女)의 법을 아뢴 것은, 부모의 몸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 자녀의 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명(命)이 있고, 녹(祿)이 있고, 조우(遭遇)가 있고, 행우(幸偶)가 있다. 명이란 빈부귀천이고, 녹이란 성쇠흥폐이다. 명이 부귀할 운에 성할 녹을 만나면 늘 편안하여 위태롭지 않고, 명이 빈천할 운에 쇠할 녹을 만나면 재앙이 이르러 늘 괴롭고 즐겁지 않다. 조(遭)란 비상한 변고를 만나는 것이니, 성탕(成湯)이 하대(夏臺)에 갇히고 문왕(文王)이 유리(牖里)에서 곤액을 당한 것과 같다.
성스럽고 밝은 덕을 지니고서도 갇히고 곤액을 당하는 변고가 있었으니 조(遭)라 이를 만하다. 변고가 비록 매우 컸으나 명이 좋고 녹이 성하여 변고가 해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조봉(遭逢)의 화라 일컫는다. 안자(晏子)가 만난 일은 크다고 이를 만하다. 곧은 병기가 가슴을 겨누고 흰 칼날이 목에 닿아 죽음의 땅을 밟고 칼과 창의 끝을 마주하였으나, 죽음을 붙잡고서도 살아 돌아왔다. 명이 좋고 녹이 성하면 조봉의 화가 해칠 수 없다. 역양(歷陽)의 도성과 장평(長平)의 구덩이에도 그 가운데 반드시 명이 좋고 녹이 성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나, 하룻밤에 함께 묻혀 죽었다. 조봉의 화가 크면 명이 좋고 녹이 성해도 물리칠 수 없다. 비유하자면 물과 불이 서로 번갈아 이기는 것과 같으니, 물이 성하면 불을 이기고 불이 성하면 물을 이긴다. [우(遇)란] 그 군주를 만나 쓰이는 것이다. 비록 좋은 명과 성한 녹이 있어도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하면 효험을 얻지 못한다. 행(幸)이란 만나 부딪치는 바에 선악을 얻는 것을 말한다. 죄를 짓고도 벗어나는 것은 행이다. 죄가 없는데 붙잡히는 것은 불행이다. 붙잡힌 지 오래지 않아 명을 받아 풀려나는 것은, 명이 좋고 녹이 성하여 뜻밖의 재앙이 상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우(偶)(也)[란] 군주를 섬기는 것을 말한다. 도로써 군주를 섬기매 군주가 그 말을 좋게 여겨 마침내 그 몸을 쓰는 것이 우이다. 행실이 군주와 어긋나 물러나 멀어지는 것은 불우(不偶)이다. 물러나 멀어진 지 오래지 않아 상관이 불러 쓰는 것은, 명이 좋고 녹이 성하여 불우의 해가 머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우와 행우는 혹 명·녹과 함께하기도 하고, 혹 명과 떨어지기도 한다. 조우가 행우하여 마침내 온전히 이루고, 조우가 불행·불우하여 마침내 패하고 상하는 것은 명과 함께하는 것이다. 중도에 이루지 못하고 선이 바뀌어 악이 되는 것, 이와 같은 것은 명·녹과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서 길흉의 성명이 있고 성쇠의 화복이 있으며, 거기에 조우·행우의 만남이 겹치니, 삶과 죽음을 따라 그 선악의 행실을 마치고 가슴속의 뜻을 이루는 자는 드물다.
사람은 하늘에서 원기(元氣)를 받아 각각 장수와 요절의 명을 받아 길고 짧은 형체를 세우니, 도공이 흙으로 궤렴(簋廉)을 만들고 대장장이가 구리로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릇의 형체가 이미 이루어지면 작게 하거나 크게 할 수 없고, 사람의 몸이 이미 정해지면 줄이거나 늘릴 수 없다. 기로써 성을 삼으니, 성이 이루어지면 명이 정해진다. 몸의 기와 형해(形骸)는 서로 끌어안고, 삶과 죽음은 기한과 서로 기다린다. 형체는 변화할 수 없고, 명은 줄이거나 더할 수 없다. 도공과 대장장이로 말하면, 사람 명의 길고 짧음을 논할 수 있다. 어떤 이가 반박하여 말하기를 「도공은 찰흙으로 궤렴을 만드는데, 궤렴은 한번 이루어지면 부서지기에 이르기까지 다시 변할 수 없다. 대장장이가 구리로 [그릇을] 만드는 경우는 비록 이미 그릇을 이루었더라도 오히려 다시 녹일 수 있다. [궤를] 준(尊)으로 만들 수는 있으나 준을 궤로 만들 수는 없다. 사람은 하늘에서 기를 받아 비록 각각 장수와 요절의 명을 받아 형체를 세웠더라도, 만약 좋은 도술과 신묘한 약을 얻으면 형체를 변화시킬 수 있고 명을 더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답하기를, 대장장이가 이루어진 그릇을 바꾸려면 반드시 먼저 불로 태워 녹여야 크고 작고 짧고 길게 할 수 있다. 사람이 수명을 늘리기를 바라 구리 그릇에 견주려 한다면, 마땅히 화로와 숯의 변화 같은 것이 있어야 형체를 바꿀 수 있고, 형체가 바뀌면 수명도 늘릴 수 있다. 사람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형체를 바꾸기를 불이 구리 그릇을 녹이듯 하겠는가? 『예(禮)』에 이르기를 「큰비가 내리면 물고기와 자라를 바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어째서인가? 빗물이 갑자기 쏟아지면 벌레와 뱀이 변화하여 물고기와 자라가 된다. 본래의 참모습을 떠나 잠시 변한 벌레이므로, 신하와 자식이 삼가 감히 바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몸의 변화를 원하는 것은 벌레와 뱀의 변화 같기를 바라는 것인가? 무릇 벌레와 뱀이 변하지 않은 것은 변하지 않은 것만 못하지 않다. 벌레와 뱀이 변하지 않았을 때는 사람이 먹지 않고, 변하여 물고기와 자라가 되면 사람이 먹는다. 먹히면 수명이 곧 짧아지니 바라는 바가 아니다. 세월이 옮겨 가면 기가 물류를 변하게 하여 두꺼비가 메추라기가 되고 참새가 대합이 된다. 사람이 몸의 변화를 원하는 것은 메추라기와 대합과 물고기·자라의 부류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사람이 대합을 잡으면 얻은 자가 먹는다. 비록 몸이 변하지 않더라도 수명이 길어질 수 없으니 바라는 바가 아니다. 노(魯)의 공우애(公牛哀)는 병으로 누운 지 이레 만에 변하여 범이 되었다. 곤(鯀)은 우산(羽山)에서 죽임을 당하여 누런 능(能)으로 변하였다. 몸이 변하기를 원하는 자는 우애가 범이 되고 곤이 능이 된 것을 바라는가? 그런데 범과 능의 수명은 사람을 넘지 못한다. 천지의 성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다. 사람의 형체를 변하여 새나 짐승이 되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무릇 바랄 만한 것은 늙은이가 변하여 갓난아이가 되는 것이고, 그다음은 흰 머리가 다시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며 몸의 기가 굳세어 수레에 뛰어오르며 쇠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라야 귀하다. 한갓 그 형체만 변하고 수명이 늘지 않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사물의 변화는 기를 따르니, 정치에 응하여 본받아 나타나는 바가 있는 듯하다. 하늘이 수명을 길게 하고자 하여 그 형체를 바꾸는 것이 아니며, 또 신령한 풀과 진귀한 약을 얻어 먹어서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늘 약을 먹어 수명을 굳게 하면 본성을 늘려 그 몸의 나이를 더할 수 있다. 때를 만나 변화하는 것은 하늘의 바른 기와 사람이 받은 참된 성이 아니다. 천지가 변하지 않고 해와 달이 바뀌지 않으며 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바름이다. 사람은 바른 기를 받았으므로 몸이 변하지 않는다. 때로 혹 남자가 변하여 여자가 되고 여자가 변하여 남자가 되는 것은, 높은 언덕이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가 구릉이 되는 것과 같다. 정치에 응하여 변하고 정치 때문에 변하는 것이지, 항상된 성이 아니다. 한(漢)이 일어날 때 한 노인이 장량(張良)에게 책을 주고는 이미 변하여 돌이 되었다. 이는 돌의 정령이 한이 일어날 상서가 된 것이다. 하수의 정령이 사람이 되어 진(秦)의 사자에게 옥벽을 준 것이 진이 망할 징조였던 것과 같다. 누에가 뽕을 먹고 늙으면 실을 자아 고치가 되고, 고치는 또 변하여 나방이 된다. 나방은 두 날개가 있어 누에의 형체를 떠나 변한다. 굼벵이는 변하여 복육(復育)이 되고, 복육은 바뀌어 매미가 된다. 매미는 두 날개가 생겨 굼벵이와 닮지 않는다. 무릇 여러 꿈틀거리고 나는 부류는 대개 그 형체를 변하고 그 몸을 바꾼다. 사람만 유독 변하지 않는 것은 바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는 갓난아이가 되고, 자라서는 장부가 되며, 늙어서는 늙은 아비가 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일찍이 변하지 않는 것은 천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천성이 변하지 않는 것은 다시 변하게 할 수 없고, 변하는 것은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변하는 것의 수명은 변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사람이 그 형체를 변하고자 하여 곧 그 나이를 더한다면 괜찮다. 만약 한갓 형체만 변하고 나이가 늘지 않는다면 매미의 부류이니, 어찌 사람이 그것을 원한다고 하겠는가?
용이라는 벌레는 한 번 있다가 한 번 없어지고, 한 번 짧았다가 한 번 길어진다. 용의 성은 잠깐 사이에 변화하여 곧 다시 평상과 다르다. 이로써 말하면, 사람은 사물로서 변하지 않는 형(刑)을 받았으니 [형체는] 변경할 수 없고 나이는 늘리거나 줄일 수 없다. 전(傳)에서 고종(高宗)에게 뽕나무와 곡식[닥나무]의 이변이 있었는데, 허물을 뉘우치고 정사를 바로 돌이켜 백 년의 복을 누렸다고 일컫는 것은 거짓이다. 전에서 송경공(宋景公)이 세 가지 착한 말을 하자 형혹(熒惑)이 삼사(三舍)를 물러나 수명이 21년 늘었다고 말하는 것도 또 거짓이다. 또 진목공(秦繆公)이 밝은 덕이 있어 상제가 그에게 19년을 주었다고 말하는 것도 또 거짓이다. 적송(赤松)·왕교(王喬)가 도를 좋아하여 신선이 되어 세상을 건너 죽지 않았다고 일컫는 것도 또 거짓이다. 가령 사람이 태어나 세운 형체를 갑(甲)이라 하면, 늙어 죽을 때까지 늘 갑의 형체를 지키니, 도를 좋아하여 신선이 되더라도 갑을 변하여 을(乙)이 되게 한 자는 없었다. 무릇 형체는 변경할 수 없고 나이는 줄이거나 늘릴 수 없다. 어째서인가?
형(形)·기(氣)·성(性)은 하늘이다. 형은 봄이 되고 기는 여름이 된다. 사람은 기로써 수명을 삼고, 형은 기를 따라 움직인다. 기와 성이 고르지 않으면 몸에서도 같지 않다. 소의 수명은 말의 절반이고 말의 수명은 사람의 절반이니, 그렇다면 소와 말의 형체는 사람과 다르다. 소와 말의 형체를 받았으면 마땅히 저절로 소와 말의 수명을 얻을 것이고, 소와 말이 변하여 사람이 되지 않으니 나이와 수명도 사람보다 짧다. 세상에서 고종의 무리를 일컬으면서 그 몸의 형체가 변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갓 그 나이와 수명이 늘었다고만 말하니, 그러므로 [그것을] 믿는 것이 있다.
형체의 혈기(血氣)는 자루에 곡식을 담은 것과 같다. [곡식이] 한 섬이면 자루의 높이와 크기도 꼭 한 섬이다. 만약 곡식을 덜거나 더하면 자루도 늘거나 준다. 사람은 기로써 수명을 삼으니, 기는 곡식과 같고 형체는 자루와 같다. 그 수명을 늘리거나 줄이면 마땅히 그 몸도 늘리거나 줄여야 하니, 형체가 어찌 예전과 같을 수 있겠는가? 만약 사람의 형체가 자루와 다르고 기가 곡식과 다르다고 한다면, 다시 박[苞瓜]으로 비유하겠다. 박의 즙은 사람의 피와 같고, 그 살은 [사람의] 살과 같다. 시험 삼아 사람에게 박의 즙을 덜거나 더하되 그 형체를 예전과 같게 하라고 하면 해낼 수 있겠는가? 사람이 박의 즙을 덜거나 더할 수 없는데, 하늘이 어찌 사람의 나이를 늘리거나 줄일 수 있겠는가? 사람의 나이는 늘리거나 줄일 수 없는데, 고종의 무리는 누가 늘려 주었단 말인가? 그런데도 늘었다고 한다. 만약 고종의 무리가 형체가 바뀌고 그 나이도 늘었다고 말한다면 믿을 만하다. 지금 나이가 늘었다고 말하면서 그 몸이 변하였다고 말하지 않으니 믿을 수 없다. 어째서인가? 사람은 하늘에서 기를 받아 기가 이루어지면 형체가 서니, 명과 서로 기다려 끝내 죽음에 이른다. 형체는 변화할 수 없고 나이도 늘릴 수 없다. 무엇으로 이를 증험하는가? 사람은 살아서는 걸을 수 있으나 죽으면 뻣뻣하게 쓰러지니, 죽으면 기가 (減)[滅]하고 형체가 사라져 무너진다.
사람의 형체를 받아 태어나면 변할 수 없는데, 그 나이를 어찌 늘릴 수 있겠는가? 사람이 태어나 늙기까지 몸에서 변하는 것은 머리털과 피부이다. 사람이 젊으면 머리털이 검고, 늙으면 머리털이 희며, 희어진 지 오래되면 누레진다. 머리털이 변하는 것이지 형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젊으면 피부가 희고, 늙으면 피부가 검으며, 검어진 지 오래되면 거무스름해져 때가 낀 듯하다. 머리털이 누렇고 피부가 때 낀 듯하므로 『예(禮)』에 이르기를 「황구(黃耇)는 끝이 없다」라고 하였다. 머리털과 [피부]가 변하므로 사람이 늙어 오래 살아 늦게 죽지만, 뼈와 살은 변경할 수 없으니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 오행의 물건 가운데 변하여 고칠 수 있는 것은 오직 토(土)뿐이다. 이겨서 말을 만들고 바꾸어 사람을 만들 수 있으니, 이는 아직 가마에 들어가 불을 거치지 않은 것을 말한다. 만약 그릇을 이루어 가마에 들어가 불을 거치면 단단하여 다시 변할 수 없다. 지금 사람은 천지가 빚고 녹여 만든 것이라 여기니, 형체가 이미 이루어져 정해졌는데 어찌 다시 고칠 수 있겠는가?
선인(仙人)의 형상을 그리면 몸에 털이 나고 팔이 변하여 날개가 되어 구름 위를 다니니 나이가 늘어 천 년을 죽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거짓 그림이다. 세상에 거짓 말이 있듯이 거짓 그림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매미와 나방의 부류이지 참된 사람이 아니다. 해외 서른다섯 나라에 모민(毛民)과 우민(羽民)이 있으니, 깃이 있으면 날개[翼]가 있는 것이다. 털과 깃을 가진 백성은 땅의 형세가 낳은 것이지, 도를 닦아서 몸에 털과 깃이 났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禹)·익(益)이 서왕모(西王母)를 만났을 때 털과 깃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죽지 않는 백성도 외국에 있으나 털과 깃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털과 깃을 가진 백성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고, 죽지 않는 백성은 털과 깃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털과 깃으로 죽지 않음을 증명할 수 없는데, 선인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으로 어찌 장수를 증험하기에 족하겠는가?
사람의 성을 논하면, 확실히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 그 선한 것은 본래 스스로 선하고, 그 악한 것은 가르치고 일러 이끌고 권면하여 선하게 할 수 있다. 무릇 임금과 아비는 신하와 자식의 성을 살펴보아, 선하면 기르고 권하여 이끌어 악에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고, 악에 가까우면 도와 지키고 금하여 막아 악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한다. 선이 악에 물들고 악이 선에 교화되어 성행(性行)을 이룬다.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경계하여 말하기를 「이제 왕께서 처음 그 명을 받으셨으니, 아아! 자식을 낳는 것과 같아 처음 태어날 때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열다섯 살 아이를 말하니, 처음에 선에 뜻을 두면 끝내 선하고, 처음에 악에 뜻을 두면 끝내 악하다. 『시(詩)』에 이르기를 「저 아름다운 사람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하였다. 전(傳)에서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누인 실과 같아서 쪽으로 물들이면 푸르고 단사로 물들이면 붉다고 하였다.
열다섯 살 아이는 실과 같아서, 그 점차 물들어 선악이 되는 것은 쪽과 단사가 누인 실을 물들여 푸르고 붉게 하는 것과 같다. 푸르고 붉음이 한번 이루어지면 본래 색과 다름이 없다. 이 때문에 양자(揚子)는 갈림길에서 울었고, 묵자(墨子)는 누인 실을 보고 울었다. 대개 근본을 떠나 다시 변할 수 없음을 슬퍼한 것이다. 사람의 성이 선이 변하여 악이 될 수 있고 악이 변하여 선이 될 수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부류이다. 쑥이 삼 사이에서 자라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고, 흰 비단이 검은 물에 들어가면 물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검다. 저 쑥의 성은 곧지 않고 비단의 바탕은 검지 않으나, 삼이 붙들어 주고 검은 물이 물들여 곧고 검게 한 것이다. 무릇 사람의 성은 쑥이나 비단과 같아서, 점차 물드는 바에 따라 선악이 변한다.
왕량(王良)·조보(造父)가 말을 잘 부린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좋지 않은 말을 좋은 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갓 좋은 말만 부릴 수 있고 좋지 않은 말은 길들여 복종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말 거간꾼이나 평범한 마부의 길들이는 기능이니 무엇이 기이하여 세상이 일컫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왕량이 수레에 오르면 말이 지치거나 둔하지 않고, 요(堯)·순(舜)이 정치를 하면 백성에 미치거나 어리석은 자가 없다고 한다. 전(傳)에 이르기를 「요·순의 백성은 집집마다 봉할 만하고, 걸(桀)·주(紂)의 백성은 집집마다 벨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 백성은 삼대(三代)가 곧은 도로 행한 바이다.
성스러운 군주의 백성은 저와 같고 악한 군주의 백성은 이와 같으니, 결국 교화에 있지 성에 있지 않다. 백이(伯夷)의 풍모를 들은 자는 탐욕스러운 사내가 청렴해지고 나약한 사내가 뜻을 세우며, 유하혜(柳下惠)의 풍모를 들은 자는 박정한 사내가 도타워지고 비루한 사내가 너그러워진다. 한갓 풍모와 이름만 들어도 오히려 혹 절개를 바꾸는데, 하물며 직접 얼굴을 맞대고 서로 도탑게 일러 줌에랴! 공자(孔子) 문하의 제자 칠십 명의 무리는 모두 경상(卿相)의 쓰임을 감당하였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입어 문재(文才)가 다듬어지고 지혜와 능력이 열 배가 된 것은 가르침의 공이요 점차 적셔 든 힘이다.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는 마을의 평범한 사람으로 기이함이 없었고, 그 가운데 특히 심하게 따르지 않은 자는 오직 자로(子路)였다. 세상에서는 자로를 항심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 일컬었으니, 공자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는 수탉 [깃]을 머리에 이고 돼지[가죽]를 차고 용맹하나 예가 없었으며,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닭을 흔들고 돼지를 휘두르며 입술 소리를 높여 현성의 귀를 시끄럽게 하였으니 악함이 지극히 심하였다. 공자가 그를 이끌어 가르쳐 점차 적시고 갈고 닦으며 열어 인도하고 깨우쳐 나아가게 하자, 사나운 기운이 사그라지고 교만한 기세가 꺾여 마침내 정사에 능하여 사과(四科)에 차례를 얻었다. 이는 대개 성을 변하게 하여 악을 선으로 만든 분명한 효험이다. 무릇 기름지고 윤택한 것은 토지의 본성이다. 기름지고 윤택한 것은 성이 아름다워 심은 곡식이 무성하다. [메마른] 것은 성이 나쁘나, 깊이 갈고 잘게 김매며 두텁게 거름을 주고 힘써 사람의 공을 들여 땅의 힘을 도우면, 그 심은 곡식이 저 기름진 땅의 것과 비슷해진다. 땅의 높고 낮음도 이와 같다. 삽으로 땅을 파서 낮은 곳을 돋우면 그 낮은 곳이 높은 곳과 가지런해지고, 만약 다시 삽질을 더하면 저 낮은 곳은 한갓 가지런해질 뿐 아니라 도리어 더 높아지고 높은 곳은 도리어 낮아진다. 가령 사람의 성에 선함과 악함이 있는 것이 저 땅에 높음과 낮음이 있는 것과 같다면, 그 가르침과 명령의 선함을 힘써 이루면 장차 선한 자와 같아질 것이다. 선함으로 두텁게 교화하고 그 가르침과 명령을 빚어내면 변하여 선하게 된다. 선하게 되면 또 도리어 예전의 선한 자를 넘어설 수 있으니, 낮은 땅에 삽질을 더하여 높은 땅보다 더 높아지는 것과 같다. 사(賜)는 명을 받지 않았는데도 재물을 불렸다고 하니, 사는 본래 하늘의 부유한 명이 더해진 것을 받지 않았으나 재물을 쌓아 세상의 부자가 된 것은 재물을 불리는 기술을 얻었기 때문이다. 무릇 그 기술을 얻으면 비록 명을 받지 않았더라도 오히려 스스로 넉넉하고 부유해진다. 성이 악한 사람도 비록 하늘의 선한 성을 받지 못하였으나 성인의 가르침을 얻으면 뜻과 행실이 변화한다. 세상에서 날카로운 칼은 천금의 값이 있다고 일컫는다. 당계(棠溪)·어장(魚腸)의 부류와 용천(龍泉)·태아(太阿)의 무리도 그 본래의 쇳덩이는 산속의 평범한 쇠이다. 대장장이가 두드리고 단련하여 날카로운 [칼]을 이룬 것이니, 어찌 날카로운 칼의 단련이 바탕을 달리하겠는가? 대장장이가 훌륭하고 장인이 교묘하여 단련을 여러 차례 거듭한 것이다. 시험 삼아 동쪽 시장에서 한 금짜리 칼을 가져다가 더욱 익히 두드리고 단련하여 그 불을 충분히 하고 그 [칼날]을 가지런히 하면 천금의 칼과 같아진다. 무릇 쇠와 돌은 천연의 것인데도 오히려 단련하는 자에 의해 옛 바탕이 바뀌는데, 하물며 사람은 오상(五常)의 성을 머금었으니, 현성이 아직 익히 단련하지 않았을 뿐이지 어찌 성이 선하지 않음을 걱정하겠는가? 옛날에 좋은 의사를 귀하게 여긴 것은 위중한 병이 어디에서 생겨났는지 알아 침과 약으로 다스려 낫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한갓 병의 이름만 알고 앉아서 보기만 한다면 무엇을 기이하다 하겠는가?
무릇 사람에게 착하지 않음이 있는 것은 곧 성과 명의 병이니, 그 가르침과 다스림 없이 변하게 하고자 한다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천도(天道)에는 참과 거짓이 있다. 참된 것은 본래 스스로 하늘과 서로 응하고, 거짓된 것은 사람이 지혜와 기교를 더한 것이나 또한 참된 것과 다름이 없다. 무엇으로 이를 증험하는가? 「우공(禹貢)」에서 말하는 「임랑(琳琅)」은 곧 토지가 낳은 참된 옥과 구슬이다. 그런데 도인(道人)이 오석(五石)을 녹여 오색의 옥을 만들면 참된 옥에 견주어 광채가 다르지 않고, 아울러 물고기와 조개의 구슬도 「우공」의 임[랑]과 같이 모두 참된 옥과 구슬이다. 그런데 수후(隨侯)가 약으로 구슬을 만들자 정밀한 광채가 참된 것과 같았으니, 도사의 가르침이 지극하고 지혜와 기교의 뜻이 더해진 것이다. 양수(陽遂)는 하늘에서 불을 취하는데, 5월 병오일(丙午日) 한낮에 오석을 녹여 부어 그릇을 만들고 갈고 닦아 빛이 나게 하여 위로 해를 향하면 불이 이른다.
(比)[此]가 참으로 불을 취하는 방법이다. 지금 함부로 칼의 갈고리 모양 날[鉤月]을 갈고 닦아 환하게 희게 하여 위로 해를 향하게 해도 불을 얻는다. 무릇 구월(鉤月)은 양수가 아닌데도 불을 취할 수 있는 까닭은 갈고 닦은 결과이다. 지금 성이 악한 사람이 성이 선한 자와 같은 부류라면 이끌고 권면하여 선하게 할 수 있고, 다른 부류라 하더라도 도인이 녹여 만든 옥, 수후가 만든 구슬, 사람이 간 칼의 구월처럼 될 수 있으니, 배움으로 가르치고 이끌며 덕으로 점차 적시면 또한 장차 날로 인의(仁義)의 지조를 갖게 될 것이다. 황제(黃帝)가 염제(炎帝)와 천자 자리를 다툴 때, 곰·큰곰·비휴·범을 가르쳐 판천(阪泉)의 들에서 싸우게 하여 세 번 싸워 뜻을 얻으니 염제가 패하였다. 요가 천하를 순에게 물려주자, 곤(鯀)은 제후로서 삼공(三公)이 되고자 하였으나 요가 들어주지 않으니, 사나운 짐승들을 성나게 하여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는데, 짐승의 뿔을 나란히 하면 성을 삼을 만하고 꼬리를 들면 깃발을 삼을 만하여, 마음을 떨치고 기세를 성하게 하여 험지에 의지해 싸워 강함을 삼았다. 무릇 금수는 사람과 형체가 다른데도 오히려 명하여 싸우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은 같은 부류임에랴! 이를 미루어 논하면, 온갖 짐승이 이끌려 춤추고 못의 물고기가 나와 듣고 여섯 말이 고개를 들고 꼴을 먹는다는 것을 다시 의심하지 않는다. 다른 부류는 다름으로써 같아지고, 같은 부류는 고름으로써 달라지니, 그 말미암는 바는 사물에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 무릇 혈기를 머금은 것은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달리 교화된다. 삼묘(三苗)의 백성은 혹 어질고 혹 어질지 못하였으나 요·순이 그들을 가지런히 한 것은 은혜와 가르침을 더하였기 때문이다.
초(楚)·월(越)의 사람이 장(莊)·악(嶽)의 사이에 살며 세월을 지내면 변하여 느긋해지니, 풍속이 옮겨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제(齊)는 느긋하고, 진(秦)은 태만하고 경솔하며, 초(楚)는 성급하고, 연(燕)은 우직하고 고집스럽다고 한다. 장·악으로 말하면, 네 나라의 백성이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오래 살고 홀로 머물면 성이 반드시 바뀐다. 무릇 성이 악한 자는 마음이 나무와 돌에 견줄 만하다. 나무와 돌도 오히려 사람에게 쓰이는데, 하물며 나무와 돌이 아닌 [사람]이겠는가? 군자의 자취에 있으면 거의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리석고 미친 병이 있어 길에서 노래하고 울며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고, 마르고 젖은 것을 보지 못하며, 아프고 병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굶주리고 배부른 것을 알지 못하면, 성이 이미 훼손되어 어찌할 수 없다. 앞으로는 볼 바가 없고 뒤로는 두려워할 바가 없다. 이 때문에 왕법(王法)은 학교의 관리를 폐하지 않고 옥사를 다스리는 관리를 없애지 않으니, 뭇사람으로 하여금 예의의 가르침을 보게 하려는 것이다. 학교는 앞에서 권면하고 법금은 뒤에서 막으니, 단주(丹朱)의 뜻도 장차 권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이를 증험하는가? 삼군의 병사는 제어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나, 용맹한 장수가 이끌고 권면하면 죽음을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 또 합려(闔廬)는 일찍이 오호(五湖) 가에서 그 병사들을 시험하였는데, 모두 칼을 어깨에 대어 피가 흘러 땅에 이르렀다. 구천(句踐)도 침궁의 뜰에서 그 병사들을 시험하였는데, 불에 뛰어들어 죽은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무릇 칼과 불은 사람의 성이 탐하는 것이 아닌데, 두 군주가 격려하고 이끌자 생각이 삶을 돌아보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군법에는 [칼로] 찔러 피를 흘리는 것을 가벼이 여긴다. 맹분(孟賁)은 용사였으나 군령을 들으면 두려워하였다. 이 때문에 숙손통(叔孫通)이 예의를 제정하자, 칼을 뽑아 공을 다투던 신하들이 예를 받들어 절하고 엎드렸으니, 처음에는 교만하고 거만하였으나 뒤에는 겸손하고 순종하게 된 것은 가르침의 위엄과 덕이 성을 바꾼 것이다. 성이 악함을 걱정하지 않고, 그가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아 스스로 [일을] 만나 화를 낳을까 걱정한다.
콩과 보리의 종자는 벼·기장과 다르나, 먹으면 굶주림을 없앨 수 있다. 소인과 군자는 성을 받은 것이 다른 부류인가? 비유하면 오곡이 모두 쓰임이 되는 것과 같으니, 실제로는 다르지 않은데 효과가 다른 것은 받은 기에 두터움과 엷음이 있기 때문이므로 성에 선악이 있는 것이다. 잔인한 자는 (授)[受]한 인(仁)의 기가 엷고, 성내는 자는 받은 용(勇)이 두텁다. 인이 엷으면 사납고 (愈)[자애]가 적으며, 용이 두터우면 사납고 의리가 없으며, 또 화기(和氣)가 부족하여 기쁨과 성냄이 때를 잃고 헤아림이 가볍고 어리석으니, 망령되이 행하는 사람은 죄 때문에 악이 된다. 사람은 오상(五常)을 받고 오장(五臟)을 머금어 모두 몸에 갖추고 있다. 받은 것이 엷고 적으므로 그 행실이 선한 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술이] 혹 진하고 혹 묽은 것과 같다. 진함과 묽음이 그 빚는 법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누룩의 많고 적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술의 묽고 진함은 같은 누룩에서 나오고, 사람의 선악은 같은 원기(元氣)에서 나오니, 기에 적고 많음이 있으므로 성에 어짊과 어리석음이 있다.
서문표(西門豹)는 성급하여 부드러운 가죽을 차서 스스로 느긋하게 하였고, 동안우(董安於)는 느긋하여 활시위를 띠어 스스로 재촉하였다. 성급함과 느긋함은 모두 중화(中和)를 잃은 것이나, 가죽과 활시위를 몸에 붙여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가죽과 활시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다면, 서문표·동안우의 이름에 나란히 할 수 있다. 가난하고 모자라 집에 담장과 처마와 (達)[문]을 갖추지 못하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헐뜯는다. 만약 재물이 넉넉해져 집을 짓고 담을 쌓아 스스로 가리고 막아 사람이 갖출 집을 갖추면, 사람들이 다시는 비난하지 않는다. 위(魏)에서 밭을 나누어 줄 때 [한 집에] 백 무(畝)였는데 업(鄴)만 홀로 이백 무였으니, 서문표가 장수(漳水)를 끌어 대어 기름진 땅이 되게 하자 무마다 한 종(鍾)을 거두었다. 무릇 사람의 바탕은 업의 밭과 같고, 도의 가르침은 장수와 같다. 교화하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지 사람의 성을 이끌기 어려움을 걱정할 것이 아니다. 낙양(雒陽) 성안의 길에는 물이 없었는데, 수공(水工)이 낙수(洛水)의 물을 끌어 올리자 밤낮으로 내달려 흘렀으니, 수공의 공이다. 이로써 말하면, 군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인의의 도가 자주 몸에 더해지는 것이니, 맹자 어머니가 집을 옮긴 것에서 대개 그 증험을 얻는다. 인간 세상의 물은 더럽고 탁하며 들 밖에 있는 것은 맑고 깨끗하니, 모두 같은 물로서 근원이 하늘 끝에서 나오나 혹 탁하고 혹 맑은 것은 있는 곳의 형세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남월왕(南越王) 조타(趙佗)는 본래 한(漢)의 어진 사람이었으나 남쪽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어 왕의 제도를 배반하고 상투를 방망이 모양으로 틀고 두 다리를 뻗고 앉는 것을 본성처럼 좋아하였다. 육가(陸賈)가 한의 덕으로 설득하고 성스러운 위엄으로 두렵게 하자, 벌떡 일어나 앉아 마음으로 깨닫고 뉘우쳐 제도를 받들고 번국(藩國)을 칭하였으며, 방망이 상투와 다리 뻗고 앉는 것을 본성처럼 싫어하였다. 앞에서는 저와 같고 뒤에서는 이와 같았다. 이로써 말하면, 또한 가르침에 있지 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릇 사람이 하늘에서 귀한 명을 받으면 반드시 땅에 길한 증험이 나타난다. 땅에 나타나므로 천명이 있음을 [안다]. 증험이 나타나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니, 혹은 사람과 사물로, 혹은 상서로운 징조로, 혹은 빛과 기운으로 [나타난다]. 전(傳)에 이르기를, 황제(黃帝)는 잉태된 지 스무 달 만에 태어났고, 태어나면서 신령하여 어려서도 말을 할 수 있었다. 자라서는 제후를 거느리니 제후가 그에게 귀의하였다. 곰과 큰곰을 가르쳐 싸우게 하여 염제(炎帝)를 치니 염제가 패하였다. 성이 남과 달랐으므로 어머니 몸에 열 달을 더 머물렀고, 명이 제왕이 될 것이었으므로 짐승을 가르칠 수 있어 짐승이 그를 위해 부림을 당하였다. 요(堯)의 몸은 가까이 가면 해와 같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았다. 홍수가 하늘에 넘치고 뱀과 용이 해를 끼치자, 요가 우(禹)에게 물을 다스리게 하니, 뱀과 용을 몰아내어 물이 다스려져 동쪽으로 흐르고 뱀과 용은 숨어 살았다. 특별하고 기이한 골상이 있었으므로 기이한 증험이 있었고, 신령한 명이 있었으므로 사물을 증험하는 효과가 있었으며, 천명이 귀할 것이었으므로 당후(唐侯)로부터 들어가 제왕의 자리를 이었다.
순(舜)이 요를 만나기 전에는 홀아비로 미천한 곳에 있었다. 고수(瞽瞍)와 상(象)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여, 곳간을 고치게 하고는 그 아래에 불을 질렀고, 우물을 치게 하고는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순은 곳간에서 내려와 화재를 입지 않았고, 우물 옆을 뚫고 나와 흙의 해를 입지 않았다. 요가 듣고 불러 쓰며 직무로 시험하였다. 관직이 다스려지고 직무가 닦여 일에 폐하거나 어지러운 것이 없었으며, 큰 산기슭의 들에 들어가게 하였으나 범과 이리가 덮치지 않고 살무사와 뱀이 물지 않았으며, 사나운 바람과 세찬 비를 만나도 가는 길에 헤매지 않았다. 무릇 사람이 죽이려 해도 해칠 수 없었고, 독충이 쏘는 들에서도 짐승과 벌레가 상하게 할 수 없었으며, 마침내 제왕의 명을 받아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후직(后稷)의 (時)[어머니]가 거인의 발자국을 밟았는데, 혹은 제곡(帝嚳)의 옷을 입고 제곡이 쉬던 곳에 앉아 쉬었다고도 하며, [그리하여] 잉태하였다. 괴이하게 여겨 좁은 골목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감히 밟지 않았고, 얼음 위에 두었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어 경사가 그 몸에 모였다. 어머니가 그 신이함을 알고 거두어 길렀다. 자라서 요를 보좌하여 지위가 사마(司馬)에 이르렀다. 오손왕(烏孫王)은 호가 곤막(昆莫)인데, 흉노(匈奴)가 그 아비를 쳐서 죽였을 때 곤막이 태어나 들에 버려졌으나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가서 먹였다. 선우(單于)가 괴이하게 여겨 신이하다 하여 거두어 길렀다. 장성하자 병사를 부리게 하니 여러 번 공이 있었다. 선우가 이에 그 아비의 백성을 다시 곤막에게 주고, 서쪽 성을 길이 지키게 명하였다.
무릇 후직은 버려져서는 안 될 [명]이었으므로 소와 말이 밟지 않고 새가 깃과 날개로 그 몸을 덮어 아껴 주었다. 곤막은 죽어서는 안 될 [명]이었으므로 까마귀가 고기를 물고 다가가 먹였다.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왕의 시녀가 임신하자 왕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 시녀가 대답하기를 「달걀만 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제가 임신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아들을 낳자 돼지우리에 버렸는데,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에 옮겨 두어 말이 밟아 죽이게 하려 하였으나, 말이 또 입김으로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왕은 천자[하늘의 아들]가 아닌가 의심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노비로 기르게 하고, 이름을 동명(東明)이라 하여 소와 말을 치게 하였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그가 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으로 엄호수(掩淲水)에 이르렀다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가 되어 동명이 건널 수 있었다.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지자 추격병은 건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으므로 북이에 부여국이 있게 되었다
. 동명의 어머니가 처음 잉태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태어나자 버렸는데, 돼지와 말이 입김으로 불어 주어 살렸다. 자라자 왕이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었다. 천명이 죽어서는 안 될 것이었으므로 돼지와 말의 구원이 있었고, 명이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될 것이었으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가 되는 도움이 있었다.
이윤(伊尹)이 태어나려 할 때, 그 어머니가 꿈에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말하기를 「절구에서 물이 나오면 빨리 동쪽으로 달아나라」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이튿날 아침 돌아보니 절구에서 물이 나오므로 곧 동쪽으로 십 리를 달아났는데, 돌아보니 그 고을이 모두 물에 잠겨 있었다. 이윤은 명이 물에 빠져 죽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그 어머니가 꿈에 감응하여 달아난 것이다. 이를 미루어 논하면, 역양(歷陽)의 도성에서 그 명이 이윤 같은 부류인 자는 반드시 미리 감동하여 다른 곳에 가 있는 효험이 있었을 것이다. 제양공(齊襄公)의 난리 때, 환공(桓公)은 공자(公子)로서 자규(子糾)와 즉위를 다투었다. 관중(管仲)은 자규를 보필하고, 포숙(鮑叔)은 환공을 보좌하였다. 관중이 환공과 다투며 활을 당겨 그를 쏘았는데, 그 허리띠 고리에 맞았다. 무릇 사람의 키는 일곱 자이고 허리띠는 그 허리를 묶으며 고리는 띠에 걸려 있어, 몸에서 가리는 곳이 한 치 안에 지나지 않으니, 이미 작아서 맞히기 어렵고 또 매끄럽고 반들거려서, 칼날이나 화살촉이 고리에 맞으면 미끄러지지 않는 것이 없다. 관중이 쏘았을 때 바로 그 고리 한가운데를 맞혀 화살이 부딪쳐 떨어지고 미끄러져 옆의 살에 맞지 않았다. 명이 부귀할 것이었으므로 신령의 도움이 있어, 고리를 쏘아 [몸에] 맞지 않은 증험이 있었다. 초공왕(楚共王)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으니, 자초(子招)·자어(子圉)·자간(子干)·자석(子晰)·기질(棄疾)이다. 다섯이 모두 총애를 받아 공왕은 세울 적자를 정하지 못하고, 이에 산천에 망제(望祭)를 지내 신에게 결정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파희(巴姬)와 함께 태실(太室)의 뜰에 옥벽을 묻고, 다섯 아들에게 재계하고 들어와 절하게 하였다. 강왕(康王)은 그것을 넘었고, 자어는 팔꿈치를 그 위에 대었으며, 자간과 자석은 모두 멀리 떨어졌고, 기질은 어려서 안겨 들어왔는데 두 번 절할 때 모두 [옥벽의] 끈을 눌렀다. 그러므로 공왕이 죽자 초는 강왕이 되었으나 아들 대에 이르러 [나라를] 잃었고, 어는 영왕(靈王)이 되었으나 자기 대에 시해되었으며, 자간은 왕이 되었으나 십여 일이었고, 자석은 서지 못하고 또 주살될까 두려워 죽었으니, 모두 끊어져 후사가 없었다. 기질이 뒤에 서서 마침내 초의 제사를 이었으니, 그 신의 부절과 같았다. 그들이 왕 노릇 한 날의 길고 짧음이 절한 곳과 옥벽의 거리의 멀고 가까움에 상응하였다. 무릇 옥벽은 땅속에 있어 다섯 아들은 알지 못하였는데, 서로 이어 들어가 절하매 멀고 가까움이 같지 않았고, 끈을 누른 것은 마치 신이 무릎 꿇는 곳을 가르쳐 준 듯하였다. 진(晉)의 도안고(屠岸賈)가 난을 일으켜 조순(趙盾)의 아들 삭(朔)을 죽였는데, 그 아내에게 유복자가 있었다.
도안가(屠岸賈)가 이를 듣고 궁중을 수색하자, 어머니가 아이를 바지 속에 넣고 빌기를 「조씨(趙氏)의 종족이 멸망할 것이라면 너는 울어라.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면 너는 소리를 내지 마라.」라고 하였다. 수색할 때에 [아이가] 끝내 울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벗어나 살 수 있었다. 정영(程嬰)이 [아이를] 싸서 [齎] 업고 산속에 숨었다. 경공(景公) 때에 이르러 한궐(韓厥)이 경공에게 말하였다. 경공이 이에 한궐과 함께 조씨의 고아를 세워 조씨의 제사를 잇게 하니, 이가 문자(文子)이다. 조씨의 고아가 소리를 내지 않았을 때에는 마치 누군가 그 입을 막은 것 같았다. 이로써 말하면 조문자(趙文子)가 선 것은 명(命)이다.
고황제(高皇帝)의 어머니는 유온(劉媼)이라 하는데, 일찍이 큰 못의 둑에서 쉬다가 꿈에 신(神)과 만났다. 이때 천둥과 번개가 치고 어두컴컴하였는데, 교룡(蛟龍)이 그 위에 있었다. 태어나서는 [용모가] 아름다웠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여 일찍이 왕온(王媼)과 무부(武負)에게서 술을 외상으로 사서 마시고 취하여 누워 있으면, 왕온과 무부는 그의 몸에서 늘 신괴(神怪)한 것을 보았다. [고조가] 머물러 마시고 취할 때마다 술이 몇 배나 팔렸다. 뒤에 못 가운데를 가다가 손으로 큰 뱀을 베었는데, 한 노파가 길을 막고 울며 「적제(赤帝)의 아들이 내 아들을 죽였다.」라고 하였다. 이 징험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늘 「동남쪽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동쪽으로 순행하여 그것을 눌러 막고자 하였다. 고조가 일어났을[起] 때에 여후(呂后)와 함께 망산(芒山)·탕산(碭山)의 산과 못 사이에 숨었다. 여후가 사람들과 함께 그를 찾을 때에 그 위에 늘 기운이 곧게 솟아 있는 것을 보았으므로 가서 찾으면 곧 그 있는 곳을 찾았다. 뒤에 항우(項羽)와 약속하기를, 먼저 진(秦)의 관(關)에 들어가는 자가 왕이 되기로 하였다. 고조가 먼저 이르자 항우가 원망하고 한스러워하였는데, 범증(范增)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시켜 그의 기운을 바라보게 하니, 기운이 모두 용(龍)이 되어 오색을 이루었으니, 이는 모두 천자의 기운이다. 급히 치십시오」라고 하였다. 고조가 가서 항우에게 사죄하였다. 항우는 아보(亞父)와 고조를 죽일 것을 꾀하여 항장(項莊)으로 하여금 칼을 뽑아 일어나 춤추게 하였다. 항백(項伯)이 이를 알고 항장과 함께 일어났다. 칼이 고조 위로 향할 때마다 항백이 곧 몸으로 고조의 몸을 덮으니, 칼이 끝내 내려가지 못하고 죽이려는 형세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마침 장량(張良)과 번쾌(樊噲)의 구원이 있어 마침내 벗어날 수 있었고, 드디어 천하의 왕이 되었다. 처음 잉태할 때에 교룡의 신이 있었고, 태어난 뒤에는 술집에서 구름 기운의 괴이함을 보았으며, 밤길에 뱀을 베자 뱀의 노파가 슬피 울었고, 시황과 여후가 빛나는 기운을 바라보았으며, 항우가 죽이려고 꾀하자 항백이 가려 주어 꾀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장량과 번쾌를 만났으니, 이는 대개 부귀의 징험으로서 기운이 드러나자 사물이 응하고 사람이 도와 구원한 것이다. 두태후(竇太后)의 아우는 이름이 광국(廣國)인데, 나이 네다섯 살에 집이 가난하여 남에게 약탈되어 팔렸다. 그 집에서는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고, [그는] 열 몇 집에 전전하여 팔렸다. 의양(宜陽)에 이르러 그 주인을 위하여 산에 들어가 숯을 구웠다. 저녁에 추워서 숯 [가마] 아래에 누웠는데, 숯이 무너져 백여 명이 모두 깔려 죽었으나 광국만 홀로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점을 쳐 보니 며칠 안에 후(侯)가 될 것이라 하였다. 그 집 [주인]을 따라 장안(長安)에 갔다가 두황후(竇皇后)가 새로 섰는데 집이 청하(淸河) 관진(觀津)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에 글을 올려 스스로 사정을 아뢰었다. 두황후[皇]가 문제(文帝)[文]에게 말하니, 불러 보고 그 연고를 물었는데 과연 그러하였으므로 이에 후하게 하사하였다. 경제(景帝)[景]가 즉위하자 광국을 장무후(章武侯)로 삼았다. 무릇 쌓은 숯이 무너져 백여 명이 모두 죽었는데 광국만 홀로 벗어났으니, 명(命)이 마땅히 부귀할 것이었으므로 한갓 살아났을 뿐 아니라 또 후로 봉해진 것이다. 우자대(虞子大)는 진류(陳留) 동혼(東昏)[昏] 사람인데, 그가 태어날 때가 밤이었다. 막 어머니 몸에서 벗어나자 어머니가 그 위에 한 필의 비단 같은 모양이 있어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날이 밝아 사람들에게 물으니, 사람들이 모두 「길(吉)하고 귀(貴)하다.」라고 하였다. 기운이 하늘과 통하였으므로 자라서 벼슬하여 지위가 사도공(司徒公)에 이르렀다. 광문백(廣文伯)은 하동(河東) 포판(蒲阪) 사람인데, 그 역시 한밤중에 태어났다. 막 태어나자 어떤 사람이 문에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아버지가 나가서 응하였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나무 지팡이 하나가 그 문 옆에 꽂혀 있었는데, 좋기가 뭇 [지팡이와] 달랐다. 그 아버지가 지팡이를 가지고 문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보이니, 사람들이 점쳐서 「길(吉)하다」라고 하였다. 문백은 자라서 배우고 벼슬하여 지위가 광한태수(廣漢太守)에 이르렀다. 문백이 마땅히 부귀할 것이었으므로 아버지가 지팡이를 받은 것이다. 그 점친 자의 말은 「지팡이는 아들의 힘에 해당한다.」라는 것과 같다. 광무제(光武帝)는 건평(建平) 원년 12월 갑자(甲子)일에 제양궁(濟陽宮) 후전(後殿) 제2 내실 안에서 태어났다. 황고(皇考)가 제양령(濟陽令)이었는데, 그때 밤에 불이 없었는데도 방 안이 저절로 밝았다. 황고가 이를 괴이하게 여겨 곧 공조리(功曹吏) 충란(充蘭)을 불러 나가서 점쟁이에게 묻게 하였다. 충란은 마하졸(馬下卒) 소영(蘇永)과 함께 점쟁이 왕장손(王長孫)의 처소에 갔다. 장손이 점을 치고 소영과 충란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길한 일이다. 말을 많이 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이 해에 경천(景天)·비화(備火) 가운데에 벼가 났는데, 세 뿌리에 한 줄기, 아홉 이삭이었고 [보통] 벼보다 한두 자 더 컸으니 대개 가화(嘉禾)였다. 원제(元帝) 초에 봉황(鳳凰)이 제양궁에 내려왔으므로 지금 제양궁에 봉황려(鳳凰廬)가 있다. 처음 이부(李父) 등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시계(柴界)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 적병을 만나 황급하고 당황하여 제양의 옛집으로 달아났다. 도착할 무렵 불같이 새빨간 빛이 옛집 길 남쪽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빛이 번쩍번쩍 위로 하늘에 닿았다가 잠시 뒤에 보이지 않았다. 왕망(王莽) 때에 알자(謁者) 소백아(蘇伯阿)가 기운을 잘 바라보았는데, 사신으로 용릉(舂陵)[舂]을 지나다가 [보니] 성곽이 울울총총(鬱鬱蔥蔥)하였다. 광무가 하북(河北)에 이르러 백아와 만나 묻기를 「경이 전에 용릉을 지날 때 무엇으로 그 기운이 좋은 줄 알았는가?」라고 하니, 백아가 대답하기를 「그 울울총총한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천명이 마땅히 흥하고 성왕(聖王)이 마땅히 나올 때에는 앞뒤의 기운의 징험이 밝게 드러난다. 선대를 이어 문(文)을 지키는 임금은 앞의 기틀에 기대어 하늘의 빛나는 기운을 받으므로 징험을 말할 것이 못 된다. 창업하여 용처럼 일어나는 자는 미천함에서 말미암아 곤궁한 가운데서 일어나니, 고조나 광무 같은 이에게 어찌 하늘과 사람과 신괴의 빛나고 드러난 징험이 없었겠는가!
명(命)은 길흉의 주재이다. [그것은] 자연의 도(道)이고 우연히 맞아떨어지는 수(數)이지, 다른 기운이나 곁의 사물이 눌러 이기거나 감응하여 움직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자서(子胥)가 칼에 엎드려 죽고 굴원(屈原)이 스스로 물에 빠진 것은 자란(子蘭)과 재비(宰嚭)가 모함하고 참소하여 오(吳)와 초(楚)의 임금이 억울하게 그들을 죽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연히 두 사람의 명이 마땅히 끊어질 때에 자란과 재비가 마침 참소하였고, 회왕(懷王)과 부차(夫差)가 마침 간사한 말을 믿은 것이다. 임금이 마침 밝지 못하고 신하가 마침 참소하였으며, 두 사람의 명은 우연히 스스로 길지 않았다. 두 가지 우연과 세 가지 합치가 마치 [인과가] 있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자연이지 다른 것이 한 것이 아니다. 하(夏)와 은(殷)의 왕조가 마침 다하고 걸(桀)과 주(紂)의 악이 마침 무르익었으며, 상(商)과 주(周)의 운수가 마침 일어나고 탕(湯)과 무왕(武王)의 덕이 마침 풍성하였다. 관룡봉(關龍逢)이 죽임을 당하고 기자(箕子)와 비간(比干)이 갇히고 죽은 것은 걸과 주의 악이 성한 때이자, 또한 두 사람의 명이 끝나는 시기였다. 이윤(伊尹)의 말을 쓰고 여망(呂望)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은 탕과 무왕이 장차 흥하려는 때이자, 또한 두 신하가 마땅히 쓰일 즈음이었다. 신하의 명에는 길흉이 있고, 어질거나 어질지 못한 임금이 그와 서로 만난다. 문왕(文王)의 때는 마땅히 창성할 것이었고 여망의 명은 마땅히 귀할 것이었으며, 고종(高宗)의 다스림은 마땅히 평안할 것이었고 부열(傅說)의 덕은 마땅히 이루어질 것이었다. 문왕과 고종이 두 신하를 위하여 태어난 것도 아니고, 여망과 부열이 두 임금을 위하여 나온 것도 아니다. 임금이 밝고 신하가 어질어 빛이 서로 비추고, 위가 닦고 아래가 다스려 도수(度數)가 서로 맞은 것이다.
안연(顔淵)이 죽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망쳤다」라고 하였다. 자로(子路)가 죽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끊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공자가 스스로 슬퍼한 말이지 실제로 그러한 도리는 아니다. 공자의 명은 왕이 되지 못할 것이었고, 두 제자의 수명은 길지 않을 것이었다. 왕이 되지 못함과 길지 못함은 받은 바가 같지 않으나, 도수가 나란히 이르러 마침 서로 응한 것이다. 두 용의 요사함이 마땅히 드러날 때에 주(周)의 여왕(厲王)이 마침 궤짝을 [열었고], 포사(褒姒)가 마땅히 주나라를 망칠 때에 유왕(幽王)이 받은 성품이 우연히 악하였다. 두 용이 여왕으로 하여금 재앙을 드러내게 한 것도 아니고, 포사가 유왕을 어리석고 미혹되게 한 것도 아니다. 우연히 만나고 마주쳐 스스로 서로 맞은 것이다. 동요(童謠)의 말이 마땅히 징험될 때에 닭싸움의 변고가 마침 생겼고, 구욕새[鴝鵒]의 점이 마땅히 응할 때에 노(魯) 소공(昭公)의 악이 마침 이루어졌다. 동요가 싸움을 불러온 것도 아니고, 구욕새가 임금의 악을 부른 것도 아니다. 시기와 운수가 스스로 이르고 사람의 행실이 우연히 맞은 것이다. 요(堯)의 명은 마땅히 순(舜)에게 선양할 것이었는데 단주(丹朱)가 무도하였고, 우(虞)의 대통은 마땅히 하(夏)에 전해질 것이었는데 상균(商均)이 행실이 법도에 어긋났다. 순과 우(禹)가 마땅히 천하를 얻을 것이어서 두 아들을 악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과 악함, 옳음과 그름이 마침 서로 만난 것이다.
화성(火星)과 묘성(昴星)은 [번갈아] 나고 들어, 묘성이 낮을 때 화성이 나오고 묘성이 보일 때 화성이 숨지만, 이는 화성의 성질이 묘성을 눌러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때가 우연히 나란하지 않고 도수의 운행이 어긋나는 것이다. 정월에 [북두 자루가] 인(寅)을 가리키면 두괴(斗魁)가 신(申)을 깨뜨리는데, 인을 가리키는 것이 신을 깨뜨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하는 형(衡)이 우연히 스스로 응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잇고 시어머니가 죽으면 며느리가 대신하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잇고[嗣] 대신하는 것이 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늙고 젊은 나이의 차례가 스스로 서로 잇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가을 기운이 곡식과 풀을 쳐서 죽이니 곡식과 풀이 시들어 상함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고 한다. 이 말은 실상을 잃었다. 무릇 사물은 봄에 나고 여름에 자라며 가을에 익고 늙어서 마침 스스로 말라 죽는데, 음기(陰氣)가 마침 성하여 그것과 만나는 것이다. 무엇으로 이를 증명하는가? 사물 가운데 가을에도 죽지 않는 것이 있으니, 생명의 본성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 백 세에 생을 마치고, 사물은 태어나 한 해에 죽는다. [사물의] 죽음은 음기가 죽인 것이라 한다면, 사람의 생이 끝나는 것은 무슨 기운에 부딪혀 죽는 것인가? 논자들은 오히려 혹 귀신이 그를 죽인다고 한다. 무릇 사람의 생이 끝날 때 귀신이 오고 사물이 죽을 때 추위가 이르는 것은 모두 마침 만난 것이다. 사람이 생을 마칠 때 귀신을 보지만, 혹 귀신을 보고도 죽지 않는다. 사물이 죽을 때 추위에 부딪히지만, 혹 추위에 부딪히고도 마르지 않는다. 무너진 집에 깔리고 무너진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은 집의 정령이나 벼랑의 기운이 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집이 낡고 벼랑이 무너지는데, 명이 흉한 사람이 마침 그곳에 있거나 밟게 된 것이다. 달이 하늘에서 이지러지면 소라가 못에서 줄어든다. 바람은 범을 따르고 구름은 용을 따른다. 같은 부류는 기운이 통하여 성질이 서로 감응하여 움직인다. 그러나 사물과 일이 서로 만나 길흉이 같은 때에 있는 것은 우연히 마침 서로 만난 것이지 기운의 감응이 아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죄가 대벽(大辟)[사형]에 이른다. 죽인 자는 죄가 마땅히 무겁고, 죽은 자는 명이 마땅히 다한 것이다. 그러므로 해로운 기운이 내려오면 갇힌 자의 명이 먼저 맞고, 성왕(聖王)이 덕을 베풀면 두터운 녹(祿)을 지닌 자가 먼저 만난다. 이 때문에 덕령(德令)이 전당(殿堂)에서 내려오면 명이 긴 죄수가 감옥 안에서 나온다. 하늘이 죄수가 아직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왕으로 하여금 덕령을 내게 한 것이 아니다. 성왕이 마침 사면을 내리고 갇힌 죄수가 마침 죽음을 면할 때를 만난 것이니, 사람이 밤에 눕고 낮에 일어나는 것과 같다. 밤에는 달빛이 다하여 일할 수 없고 사람의 힘도 지쳐서 한번 쉬고자 하며, 낮에는 햇빛이 밝아 누운 사람도 깨어나고 힘도 다시 넉넉해진다. 하늘이 낮으로써 [사람을] 일하게 하고 밤으로써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함이 낮과 서로 응하고 쉼이 밤과 서로 맞는 것이다.
기러기와 고니가 회계(會稽)에 모이는 것은 갈석(碣石)의 추위를 피하여 떠나왔다가 백성의 밭에서 수확이 끝난 때를 만난 것이니, 백성의 밭을 밟으며 풀과 낟알을 쪼아 먹는다. 낟알이 다하고 먹이가 없어질 때 봄비가 마침 내리면 더위를 피하여 북쪽으로 떠나 다시 갈석으로 간다. 코끼리가 영릉(靈陵)에서 밭을 가는 것도 이와 같다. 전(傳)에 이르기를 「순(舜)을 창오(蒼梧)에 장사 지내니 코끼리가 그를 위해 밭을 갈았고, 우(禹)를 회계에 장사 지내니 새가 그를 위해 밭을 매었다.」라고 하였다. [이는] 일의 실상을 잃은 허망한 말이다. 남자에게 단명(短命)의 상이 있으면 장가들 때 반드시 일찍 과부가 될 아내를 얻고, 일찍 과부가 될 아내는 시집갈 때 역시 요절할 남편을 만난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남녀가 일찍 죽는 것은 남편이 아내를 해치고 아내가 남편을 해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서로 해치는 것이 아니라 명이 그러한 것이다. 불이 타는데 물을 끼얹는다면 물이 불을 해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이 마침 스스로 꺼지고 물이 마침 스스로 엎질러진 것이라면, 두 가지가 각각 스스로 무너진 것이지 서로 해친 것이 아니다. 지금 남녀가 일찍 요절하는 것은 물이 불에 끼얹는 것에 비할 것이 아니라, 마침 스스로 꺼지고 엎질러지는 부류이다. 아버지를 해치는 아들, 형을 방해하는 아우도 이와 같은 부류이다. 같은 집에 함께 살아 기운이 서로 더하고 능멸하여 여위고 쇠약해져 다하여 죽음에 이른다면 서로 해쳤다고 할[可] 수 있다. [그러나] 혹 천 리 밖에서 객사하거나, 병기·불·압사·익사로 죽어 기운이 서로 범하지 않았는데, 서로 해쳤다는 것이 어찌 된 것인가? 왕망(王莽)의 고모 정군(正君)은 두 남편에게 시집가기로 허락되었는데, 두 남편이 죽었고, 조(趙)나라로 가게 되었을 때 [조]왕이 죽었다.
기운이 서로 더해지지도 않았는데 멀리서 세 집을 해쳤다고 하니, 얼마나 가혹한가. 황차공(黃次公)은 이웃 무당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점쟁이가 그 여자의 상이 귀하다고 하였으므로 차공의 지위가 승상(丞相)에 이르렀다고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차공이 마땅히 귀할 것이어서 가다가 그 여자와 만난 것이고, 여자 역시 스스로 존귀할 것이어서 차공의 집안에 들어간 것이다. 우연히 마침 그렇게 스스로 서로 만난 것이니, 때[時]이다. 녹(祿)이 없는 사람은 장사를 하여도 이익이 없고 농사를 지어도 씨가 [자라지] 않는데, 그의 성품이 재화를 해치고 명이 곡식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명이 가난하면 이익이 없는 재화를 쌓아 두고, 녹이 나쁘면 불어나지 않는 곡식을 심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집에 길흉이 있고 이사에 [꺼리는] 해와 달이 있다고 한다. 실제 일은 그렇지 않다. 천도(天道)는 알기 어려우니, 가령 명이 흉한 사람과 마땅히 쇠할 집안이 있어, 집을 지으면서 불길한 땅을 만나고 이사하면서 마침 해와 달의 금기에 부딪혔다고 하자. 한 집안이 금기를 범하여 식구가 수십 명인데, 그로 인하여 죽는 자는 반드시 녹이 쇠하고 명이 박한 사람이다. 이를 미루어 논하면, 벼슬의 나아감과 물러남, 옮김도 다시 알 수 있다. 때가 마침 물러나야 할 때이면 임금이 참소하는 입을 쓰고, 때가 마침 일어나야 할 때이면 어진 사람이 자기를 천거한다. 그러므로 벼슬하여 장차 관직을 얻으려 할 때에는 군자가 선(善)을 도와주고, 장차 지위를 잃으려 할 때에는 소인이 뛰어난 이를 헐뜯는다. 공백료(公伯寮)가 자로(子路)를 계손(季孫)에게 헐뜯자 공자는 명(命)을 말하였다. 노(魯)나라 사람 장창(臧倉)이 맹자(孟子)를 평공(平公)에게 참소하자 맹자는 하늘을 말하였다. 도가 아직 행해질 때가 아니어서 참소와 서로 만났고, 하늘이 아직 자기를 허여하지 않아서 악인이 입을 놀린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명을 말하고 공백료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맹자는 하늘을 말하고 장창을 탓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때와 명이 마땅히 저절로 그러함을 알았던 것이다. 이를 미루어 논하면, 임금의 다스리는 도와 공적·교화도 다시 말할 수 있다. 명이 마땅히 귀하면 때가 마침 평안하고, 시기가 마땅히 어지러우면 녹이 쇠함을 만난다. 다스림과 어지러움, 성공과 실패의 때가 사람의 흥망·길흉과 마침 서로 만나는 것이다. 이로써 성인과 현인이 번갈아 일어나는 것을 논하면 역시 이러한 부류이다.
성스러운 임금은 창졸간에 용처럼 일어나고, 훌륭한 보좌는 때를 만나 뛰어올라 발탁된다. 세상에서는 한신(韓信)과 장량(張良)이 한왕(漢王)을 도왔으므로 진(秦)이 망하고 한(漢)이 흥하여 고조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무릇 고조는 명이 마땅히 스스로 왕이 될 것이었고, 한신과 장량 같은 무리는 때가 마땅히 스스로 흥할 것이었으니, 둘이 서로 만난 것이 마치 일부러 서로 찾은 것 같았다. 이 때문에 고조가 풍(豐)·패(沛)에서 일어나자 풍·패의 자제들 가운데 서로 부귀해진 자가 많았으니, 하늘이 자제들로써 고조를 도운 것이 아니라 명과 상의 크고 작음이 마침 서로 응한 것이다. 조간자(趙簡子)가 태자 백로(伯魯)를 폐하고 서자 무휼(無恤)을 세웠다. 무휼이 어진 [신하를] 만난 것은 명이 또한 마땅히 조(趙)의 임금이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백로가 못나서 무휼만 못하였다고 하는데, 백로는 명이 마땅히 천할 것이어서 지혜와 생각이 많이 어지러웠던 것이다. 한생(韓生)은 벼슬이 태부(太傅)에 이르렀는데, 세상에서는 예관(倪寬)에게 힘입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태부는 마땅히 귀할 것이어서 마침 예관과 만난 것이다. 조무(趙武)가 바지 속에 숨어 종일 울지 않은 것은 누군가 그 입을 막거나 그 소리를 막은 것이 아니라, 명과 때가 마땅히 살 것이어서 잠들어 누웠다가 마침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군공(軍功)으로 후(侯)가 된 자는 반드시 전쟁에서 죽을 자의 머리를 베고, 부잣집 상인은 반드시 가난한 집의 재물을 빼앗는다. 땅을 깎이고 후의 작위를 면하며, 영(令)과 상(相)에서 파면되어 물러나는 것은 죄와 법이 명백해서이지만 [실은] 녹과 품계가 마침 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기(厲氣)가 맞히는 것은 반드시 명이 짧은 사람에게 가해지고, 흉년이 드러나는 것은 반드시 굶주리고 텅 빈 집안이다.
사람들은 명은 알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명은 매우 알기 쉽다. 무엇으로 아는가? 골체(骨體)로써 한다. 사람의 명은 하늘에서 받으니, 곧 겉으로 드러난 징후가 있어 몸으로 알 수 있다. 겉의 징후를 살펴 명을 아는 것은 말[斗]과 곡(斛)을 살펴 그 용량을 아는 것과 같다. 겉의 징후란 골법(骨法)을 말한다. 전하는 말에 황제(黃帝)는 용의 얼굴이고, 전욱(顓頊)은 [머리에] 오(午) 자 모양을 이었으며, 제곡(帝嚳)은 이가 붙어 있고, 요(堯)는 눈썹이 여덟 빛깔이며, 순(舜)은 눈에 눈동자가 둘이고, 우(禹)는 귀에 구멍이 셋이며, 탕(湯)은 팔에 팔꿈치가 둘이고, 문왕(文王)은 젖이 넷이며, 무왕(武王)은 눈이 위를 바라보고, 주공(周公)은 등이 굽었으며, 고요(皋陶)는 말의 입이고, 공자(孔子)는 [정수리가] 오목하였다[反羽]고 한다. 이 열두 성인은 모두 제왕의 지위에 있었거나 혹은 임금을 보좌하며 세상을 근심한 이들로서, 세상이 함께 듣고 유자(儒者)들이 함께 말하며, 경전(經傳)에 실린 것은 비교적 뚜렷하여 믿을 만하다. 짧은 책이나 속된 기록, 죽간과 비단에 이어 적힌 글로서 유자들이 보지 못한 것들은 많아 하나가 아니다. 창힐(蒼頡)은 눈이 넷이었고 황제의 사관이 되었다. 진(晉) 공자 중이(重耳)는 갈비뼈가 통뼈였고[騈脅] 제후의 패자가 되었다. 소진(蘇秦)은 코에 뼈가 [솟아] 있었고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장의(張儀)는 갈비뼈가 통뼈였고 역시 진(秦)과 위(魏)의 재상이 되었다. 항우(項羽)는 눈동자가 둘이어서 우순(虞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고조와 천하를 나누어 왕이 되었다.
진평(陳平)은 가난하였으나 먹고 마시는 것이 넉넉한 듯 용모와 몸이 훤하고 좋았으므로, 뭇사람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평은 무엇을 먹고 살쪘는가?」라고 하였다. 한신(韓信)이 등공(滕公)에게 눈에 띄어 형벌[質]을 면한 것도 얼굴 모양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얼굴 모양이 살지고 훤한 것도 하나의 상(相)이다. 고조는 코가 높고 용의 얼굴이며 수염이 아름다웠고, 왼쪽 넓적다리에 검은 점이 일흔두 개 있었다. 선보(單父)의 여공(呂公)이 관상을 잘 보았는데, 고조의 모습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 그 딸을 고조에게 아내로 주었으니, 여후(呂后)가 그이다. 마침내 효혜제(孝惠帝)[帝]와 노원공주(魯元公主)를 낳았다. 고조가 사수(泗水) 가의 정장(亭長)이었을 때 휴가를 얻어 밭으로 돌아가, 여후와 두 자녀와 함께 밭에 있었다. 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마실 것을 청하고는 여후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부인은 천하의 귀인입니다.」라고 하였다. 두 자녀의 상을 보게 하니, 효혜를 보고 말하기를 「부인이 귀하게 되는 까닭은 바로 이 사내아이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노원의 상을 보고 「모두 귀합니다.」라고 하였다. 노인이 떠나고 고조가 밖에서 오자 여후가 고조에게 말하였다. 고조가 노인을 뒤쫓아 가서 멈추게 하고 자신의 상을 보게 하였다. 노인이 말하기를 「아까 부인과 아이들의 상이 모두 그대를 닮았는데, 그대의 상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뒤에 고조가 천하를 얻으니 노인의 말과 같았다. 이를 미루어 견주어 보면, 한 집안의 사람들이 모두 부귀의 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부류가 같고 기운이 고르면 성품·몸·법상(法相)이 본디 저절로 서로 비슷하다. 기운이 다르고 부류가 다르면 또한 둘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 부귀한 남자는 부귀한 아내를 얻고, 여자 역시 부귀한 남자를 얻는다. 무릇 두 상이 고르지 않은데 서로 만나면 곧 즉사하는 일이 있고, 아직 서로 맞아들이지 않았더라도 미리 죽는 화가 있다. 왕망의 고모 정군은 시집가기로 허락되어 기일에 이르러 가려 할 때마다 남편이 곧 죽었다. 이렇게 두 번 하자 이에 조왕(趙王)에게 바쳤는데, 조왕이 아직 맞아들이기 전에 또 죽었다. 청하(淸河)의 남궁대유(南宮大有)가 정군의 아버지 치군(稚君)과 친한 사이로 만났는데, [정군의] 상을 보고 치군에게 말하기를 「귀하기가 천하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는 선제(宣帝)의 치세로 원제(元帝)가 태자였는데, 치군이 이에 위군도위(魏郡都尉)를 통하여 [정군을] 태자에게 들이니, 태자가 그를 총애하여 아들 군상(君上)을 낳았다. 선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자 정군은 황후가 되고 군상은 태자가 되었다. 원제가 붕어하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가 성제(成帝)이고, 정군은 황태후가 되어 마침내 천하의 어머니가 되었다. 무릇 정군의 상은 마땅히 천하의 어머니가 될 것이었는데, 앞서 허혼한 두 집안과 조왕은 천하의 아버지가 될 상이 없었으므로, 아직 시집가기 전에 두 남편이 죽고 조왕이 죽은 것이다. 이는 두 남편과 조왕에게 제왕의 큰 명이 없고, 정군이 세 집안과 서로 만나서는 안 되었다는 징험이다. 승상 황차공은 전에 양하(陽夏)의 유요(游徼)였는데, 관상을 잘 보는 자와 수레를 함께 타고 가다가 나이 열일고여덟 된 한 부인을 보았다. 관상가가 그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부인은 마땅히 크게 부귀하여 후(侯)에 봉해질 자의 부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차공이 수레를 멈추고 자세히 보니, 관상가가 말하기를 「지금 이 부인이 부귀하지 않다면 점서(卜書)는 쓸모가 없다.」라고 하였다. 차공이 물어보니 곧 이웃 마을 사람 무당 집의 딸이었으므로 곧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다. 그 뒤 차공은 과연 크게 부귀해져 지위가 승상에 이르고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무릇 차공이 부귀할 것이었으므로 부인이 마땅히 그의 짝이 되었고, 그러므로 과연 서로 만나 마침내 함께 부귀해진 것이다. 만약 차공의 명이 천하였다면 그 부인을 짝으로 얻지 못하였을 것이고, 부부가 되어서는 안 될 때라면 두 남편과 조왕의 화가 있었을 것이다. 무릇 온 집안이 모두 부귀의 명을 가진 뒤에야 부귀의 일을 감당한다. 골법과 형체에 응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이별하거나 죽게 되어 오래도록 큰 복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귀한 집에서 부리는 노복과 기르는 소와 말은 반드시 뭇 [집안의 것과] 다른 점이 있다. 노복은 죽거나 달아나지 않는 상이 있고, 소와 말은 새끼를 자주 낳는 성질이 있으며, 밭에는 싹이 나 빨리 익는 곡식이 있고, 장사에는 쌓아 두면 좋고 빨리 팔리는 재화가 있다. 이 때문에 명을 아는 사람은 빈천한 가운데서 부귀를 보고, 부귀한 가운데서 빈천을 본다.
골절(骨節)의 법을 살피고 피부의 결을 살펴서 사람의 성(性)과 명(命)을 헤아리면 응하지 않는 것이 없다. 조간자가 고포자경(姑布子卿)으로 하여금 여러 아들의 상을 보게 하였는데 길한 자가 없었고, 적(翟) 출신 여종의 아들 무휼에 이르러서 귀하다고 하였다. 무휼이 가장 어질고 또 귀한 상이 있었으므로, 간자는 뒤에 태자를 폐하고 무휼을 세웠고 마침내 제후가 되었으니 양자(襄子)가 그이다. 관상쟁이가 경포(黥布)의 상을 보고 먼저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뒤에 과연 형벌을 받고 왕에 봉해졌다. 위청(衛靑)의 아버지 정계(鄭季)가 양신공주(楊信公主) 집안의 종 위온(衛媼)과 사통하여 위청을 낳았다. [위청이] 건장궁(建章宮)에 있을 때 쇠사슬을 찬 죄수가 그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귀하여 후(侯)에 봉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위청이 말하기를 「남의 종으로서는 매 맞고 욕먹지 않으면 족하다! 어찌 감히 후에 봉해지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뒤 위청은 군리(軍吏)가 되어 싸움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워 등급을 뛰어넘어 봉해지고 관직이 더해져 마침내 대장군이 되고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졌다. 주아부(周亞夫)가 아직 후에 봉해지기 전에 허부(許負)가 그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3년 뒤에 장상(將相)의 반열에 들어 나라의 권병을 잡아 귀하고 무거워져 신하 가운데 둘도 없을 것이다. 그 뒤 9년이 지나 그대는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아부가 웃으며 말하기를 「신의 형이 이미 [아버지를] 대신하여 후가 되었으니, 만일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대신해야 한다면 아부가 어찌 후를 말하겠는가? 그러나 이미 귀해진다면 허부의 말대로 또 어찌 굶어 죽는다고 하는가? 나에게 가리켜 보여 달라!」라고 하였다. 허부가 그의 입을 가리키니 세로 주름이 입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말하기를 「이것이 굶어 죽는 상법(相法)이다.」라고 하였다. 3년이 지나 그의 형 강후(絳侯) 승(勝)이 죄를 지으니, 문제(文帝)가 강후의 아들 가운데 어진 자를 가려 아부를 추천받아 이에 조후(條侯)에 봉하여 강후의 뒤를 잇게 하였다. 문제 후(後) 6년에 흉노가 변경에 들어오자 이에 아부를 장군으로 삼았다.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 아부는 승상이 되었다가 뒤에 병으로 면직되었다. 그의 아들이 아부를 위하여 공관(工官) 상방(尙方)의 갑옷과 방패 오백 벌을 장례에 쓸 수 있는 것으로 샀는데, 품팔이꾼을 고되게 부리고 돈을 주지 않았다. 품팔이꾼이 그가 관의 기물을 몰래 산 것을 알고 원망하여 그 아들을 위에 고발하였다. 경제가 옥리에게 넘겨 문책하게 하였는데, [아부는] 이로 인하여 닷새 동안 먹지 않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등통(鄧通)이 문제에게 총애를 받았을 때 귀하기가 공경(公卿)보다 위에 있었고 상으로 받은 것이 억만이어서 임금과 대등하였다. 관상쟁이가 그의 상을 보고 말하기를 「마땅히 빈천하여 굶어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제가 붕어하고 경제가 즉위하자, 등통은 몰래 돈을 주조한 죄가 있어 경제가 조사하게 하니, 등통은 달아나 남의 집에 붙어살다가 죽었는데, 이름으로 된 돈 한 푼도 [없었다]. 한태부(韓太傅)가 제생(諸生)이었을 때 관상쟁이에게 50전을 빌려 주고 그와 함께 벽옹(璧雍) 안에 들어가, 벽옹의 제자 가운데 누가 귀하게 될지 상을 보게 하였다. 관상쟁이가 예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저 사람은 평생 마땅히 귀하여 품계가 삼공(三公)에 이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생은 관상쟁이에게 사례하여 보내고, 예관에게 명함을 통하여 아교와 옻칠 같은 교분을 맺고 힘을 다해 공경하였으며, 거처를 옮겨 예관을 따르며 깊이 스스로 그에게 붙었다. 예관이 일찍이 몹시 앓았을 때 한생은 종처럼 보살펴 은혜의 깊음이 골육보다 더하였다. 뒤에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다. 예관은 지위가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는데, 주군(州郡)이 그 뜻을 받들어 [한생을] 불러 청하고 발탁하여 조정에 천거하니 마침내 태부에 이르렀다. 무릇 쇠사슬 찬 죄수와 허부, 그리고 등통과 예관의 상을 본 관상쟁이는 명을 아는 관상쟁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명을 아는 관상쟁이가 골체의 증거를 살펴 부귀빈천을 보는 것은, 사람이 쟁반과 사발 같은 그릇을 보고 그 쓰일 바를 아는 것과 같다. 좋은 그릇은 반드시 귀한 사람에게 쓰이고 나쁜 그릇은 반드시 천한 자에게 베풀어지니, 존귀한 솥은 뒷간 곁에 있지 않고 박[匏瓜]은 전당 위에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부귀한 뼈가 빈천의 괴로움을 만나지 않고 빈천한 상이 부귀의 즐거움을 만나지 않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릇이 물건을 담는 데에 말[斗]과 섬[石]의 용량이 있는 것은 사람의 작위에 높고 낮은 차등이 있는 것과 같다. 그릇이 그 용량을 넘으면 물건이 넘쳐 버려지고, 작위가 그 차등을 넘으면 죽어 남아 있지 못한다. 명을 논하는 자가 만약 그릇에 견주어 골체의 법을 살핀다면, 명이 몸의 형체에 정해져 있음을 [알 것이다].
부귀빈천에만 골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행(操行)의 청탁(淸濁)에도 법리(法理)가 있다. 귀천과 빈부는 명(命)이고, 조행의 청탁은 성(性)이다. 명에만 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에도 골법이 있다. 명에 분명한 상이 있는 줄만 알고 성에 골법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니, 이는 명의 겉 증거만 보고 성의 부험(符驗)은 보지 못한 것이다. 범려(范蠡)가 월(越)나라를 떠나 제(齊)나라에서 대부 종(種)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나는 새가 다하면 좋은 활은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가 죽으면 사냥개는 삶긴다. 월왕은 사람됨이 목이 길고 새의 부리 같아서 환난은 함께할 수 있어도 안락은 함께할 수 없다. 그대는 어찌 떠나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대부 종은 떠나지 못하고 병을 칭하여 조회하지 않다가 칼을 하사받아 죽었다. 대량(大梁) 사람 위료(尉繚)가 진시황(秦始皇)에게 천하를 아우를 계책을 유세하자, 시황이 그 계책을 따르고 그와 대등한 예로 대하며 의복과 음식을 그와 똑같이 하였다. 위료가 말하기를 「진왕은 사람됨이 코가 높고 눈이 길며, 매의 가슴에 승냥이 소리를 내고, 은혜가 적으며 범의 눈에 이리의 마음을 지녀, 곤궁할 때는 쉽게 남에게 몸을 낮추지만 뜻을 얻으면 또한 남을 가볍게 여긴다. 나는 포의(布衣)인데도 나를 만나면 늘 몸소 나에게 낮춘다. 참으로 진왕이 천하에서 뜻을 얻는다면 [천하 사람이] 모두 포로가 될 것이다. 함께 사귈 수 없다.」라고 하고 이에 달아났다. 그러므로 범려와 위료는 성품과 행실의 증거를 보고 앞으로 올 일의 실상을 정하였는데, 실제로 그 효험이 있어 그 법상(法相)과 같았다.
이로써 말하면, 성과 명이 형체에 매여 있음이 분명하다. 척서(尺書)에 실려 세상이 함께 보는 것으로 고금을 견주어 보면, 듣지 못한 것도 반드시 많아 하나가 아니며 모두 그 실상이 있을 것이다. 기운을 하늘에서 받고 형체를 땅에서 세우니, 땅에 있는 형체를 살펴 하늘에 있는 명을 알면 그 실상을 얻지 못함이 없다. 공자가 담대자우(澹臺子羽)의 상을 보고, 당거(唐擧)가 채택(蔡澤)을 점친 것이 맞지 않았다는 글이 전하는데, 이는 살핌이 자세하지 못하여 잘못된 것이니, 어찌 [상의] 겉이 숨겨지고 미묘해서이겠는가? 상은 혹 안에 있고 혹 밖에 있으며, 혹 형체에 있고 혹 소리와 기운에 있으니, 밖을 살피는 자는 그 안을 빠뜨리고, 형체에 [주목하는] 자는 소리와 기운을 놓친다. 공자가 정(鄭)나라에 갔다가 제자들과 서로 잃어, 공자가 홀로 정나라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子貢)에게 묻기를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머리는 요(堯)와 닮았고, 그 목은 고요(皋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비슷하다. 그러나 허리 아래로는 우(禹)에게 세 치 미치지 못하며, 초상집의 개와 같다.」라고 하였다. 자공이 이를 공자에게 알리니 공자가 흔연히 웃으며 말하기를 「형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초상집의 개와 같다는 것은 그렇다! 그렇다!」라고 하였다. 무릇 공자의 상에 대해 정나라 사람은 그 실상을 잃었다. 정나라 사람이 밝지 못한 것은 [관상의] 법술이 얕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자우를 잘못 본 것과 당거가 채택에게 미혹된 것은, 정나라 사람이 공자의 상을 보면서 형상의 실상을 다 보지 못한 것과 같다. 용모로 사람을 취하다가 자우에게서 잘못하였고, 말로 사람을 취하다가 재여(宰予)에게서 잘못하였다.
사람이 태어날 때 성(性)과 명(命)이 마땅히 부귀할 자는 처음에 자연의 기운을 받아, 길러져 자라면 부귀의 명이 드러난다. 문왕은 붉은 참새를 얻었고, 무왕은 흰 물고기와 붉은 까마귀를 얻었다. 유자들은 이를 논하여, 참새는 곧 문왕이 명을 받은 것이고, 물고기와 까마귀는 곧 무왕이 명을 받은 것이며, 문왕과 무왕은 하늘에서 명을 받았는데 하늘이 참새와 물고기·까마귀로써 명을 준 것이라 한다. 하늘이 붉은 참새로 문왕에게 명하였으나 문왕이 받지 않자, 하늘이 다시 물고기와 까마귀로 무왕에게 명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본디 하늘에서 받은 명은 없으나, 자기를 닦고 선을 행하여 선행이 하늘에 들리면 하늘이 이에 제왕의 명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새와 물고기·까마귀는 하늘이 왕이 되게 하는 명이고, 왕이 받들어 주벌을 행하는 근거라는 것이다. 실상대로 논하면 [이는] 명이 아니다. 명이란 처음 받아 얻어서 태어나는 것을 이른다. 사람이 태어나 성을 받으면 곧 명도 받는다. 성과 명은 함께 받아 같은 때에 아울러 얻는 것이지, 먼저 성을 받고 뒤에 명을 받는 것이 아니다. 무엇으로 이를 밝히는가? 기(棄)는 요(堯)를 섬겨 사마(司馬)가 되어 직관(稷官)에 있었으므로 후직(后稷)이 되었다. 증손 공류(公劉)는 태(邰)에 살다가 뒤에 빈(豳)으로 옮겨 살았다. 후손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세 아들은 태백(太伯)·중옹(仲雍)·계력(季歷)이고, 계력이 문왕 창(昌)을 낳았다. 창이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성스러운 상서가 나타났다. 그러므로 고공이 말하기를 「우리 대에 마땅히 흥할 자가 있을 것이니, 그것은 창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백이 이를 알고 사양하여 오(吳)로 가서 몸에 문신하고 머리를 잘라 왕계(王季)에게 양보하였다. 문왕이 명을 받았다는 것은 이때를 이르니, 하늘의 명이 사람에게 본디 있었고 태왕(太王) 고공이 그것을 일찍 본 것이다. 이것도 오히려 [이른 것이] 아니니, 문왕은 어머니 몸속에 있을 때 이미 명을 받았다. 왕자(王者)는 한번 명을 받으면 안으로는 성이 되고 밖으로는 몸이 된다. 몸이란 얼굴·광대뼈와 골법으로, 태어나면서 받는 것이다.
녹질(祿秩) 백 석 이상의 관리로부터 왕후(王侯) 이하, 낭장(郎將)·대부(大夫)에서 원사(元士)에 이르기까지, 밖으로는 자사(刺史)·태수(太守)에 미치기까지 녹질에 있는 관리는 부귀의 명을 받아 태어나면서 얼굴에 드러난 표지가 있다. 그러므로 허부와 고포자경이 번번이 그 징험을 보았다. 벼슬하는 자는 품계에 따라 옮겨 가는데, 옮겨 가는 사람 가운데 혹 공경에 이르는 자는 명과 녹이 존귀하여 지위와 명망이 높고 크다. 왕자는 존귀함의 으뜸이고 높고 큼의 최고이니, 태어나면서 높고 큰 명이 있어 그때 몸에 존귀한 기이함이 있었으므로, 고공이 이를 안 것은 젖이 넷인 괴이함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릇 젖이 넷인 것은 성인의 증표이다. 어머니 몸속에서 하늘의 성스러운 명을 받은 것이지, 어찌 자란 뒤에 도덕을 닦고 행하자 젖 넷이 비로소 생겼겠는가? 젖 넷으로 망양(望羊)을 논하면, 역시 태(胎)였을 때 이미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유온이 큰 못에서 쉬다가 꿈에 신과 만나 마침내 고조를 낳았으니, 이때 이미 명을 받은 것이다. 광무는 제양궁에서 태어났는데, 한밤중에 불이 없는데도 방 안이 환하였다. 군하졸(軍下卒) 소영이 공조사(公曹史) 충란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길한 일이니 말을 많이 하지 마라.」라고 하였다. 이때 이미 명을 받은 것이다. 유독 문왕과 무왕만 붉은 참새와 물고기·까마귀를 얻고서야 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릇되다. 하늘이 한 번 명하면 왕자가 이에 흥하는 것이지, 다시 거듭 명하지 않는다. 부귀의 큰 명을 얻으면 스스로 일어나 왕이 된다. 무엇으로 이를 증명하는가? 부잣집 늙은이는 재산이 천금을 쌓는다. 태어나면서 부자의 뼈가 있어 생업을 다스리고 재화를 쌓아 늙음에 이르러 부옹(富翁)이 된다. 무릇 왕자는 천하의 늙은이[翁]이니, 받은 명이 몸속에 정해져 있는 것은 새가 알 껍질 속에서 암수가 갈라지는 것과 같다. 알 껍질이 품어지면 암수가 생기고, 날과 달이 차면 뼈마디가 강해지며, 강해지면 수컷이 스스로 암컷을 거느린다. 수컷은 나서 자란 뒤에 혹 누가 가르쳐 수컷이 되게 한 뒤에야 감히 암컷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이는 기질과 성품이 굳세고 강하여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릇 왕자는 천하의 수컷이니, 그 명이 마땅히 왕이 될 것이다. 왕의 명이 잉태할 때 정해지는 것은 부귀한 뼈가 생기고 새의 수컷이 알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사람과 새만이 아니라 만물이 다 그러하다. 풀과 나무는 열매와 씨에서 나서 땅을 뚫고 나와 싹이 되고, 점점 줄기와 잎이 나서 길고 짧고 크고 가는 것이 되는데, 모두 열매와 씨에 [그 바탕이] 있다. 왕자는 길고 큼의 최고이다. 주초(朱草)의 줄기는 바늘 같고 자지(紫芝)의 싹은 콩 같으나 자라서 상서가 된다. 왕자가 기운을 받아 태어나는 것도 이와 같다.
어떤 이가 말하였다. 「왕자는 태어날 때 천명을 받지만, 장차 왕이 되려 할 때 하늘이 다시 명하니, 이는 공경 이하가 조서로 봉하고 제수받은 뒤에야 감히 자리에 나아가는 것과 같다. 붉은 참새와 물고기·까마귀는 상천(上天)이 봉하고 제수하는 명이다. 천도와 인사에는 서로 명하고 부리는 뜻이 있다. [반박하여 말하기를] 자연하고 무위함이 하늘의 도이다. 문왕에게 붉은 참새로, 무왕에게 흰 물고기로 명하였다면 이는 유위(有爲)이다.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이 재물을 나눌 때 [관중이] 많이 가졌는데, 포숙은 주지 않았고 관중은 요구하지 않았다. 안으로 서로 알아주는 것이 있어 저를 나처럼 보았으므로 가지는 데 의심하지 않았다.
성인이 일어나 왕이 되는 것은 관중이 재물을 가진 것과 같다. 벗 사이의 저와 나에게는 주고받는 뜻이 없는데, 상천은 자연인데도 명하고 부리는 징험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천도는 유위이고 벗 사이는 자연이라는 것이 된다. 한고조가 큰 뱀을 베었을 때 누가 베게 하였는가? 어찌 천도가 먼저 이르러 [명한] 뒤에야 감히 벤 것이겠는가! 용기가 떨쳐 일어난 것은 본성이 저절로 그러한 것이니, 큰 뱀을 베고 진(秦)을 치고 항우를 죽인 것은 같은 하나의 실상이다. 주(周)의 문왕·무왕이 명을 받아 은(殷)을 친 것도 같은 뜻이다. 고조는 명을 받아 부림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서 유독 문왕·무왕만 참새와 물고기의 명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릇되다.」 [이를] 논란하여 말한다. 『강왕지고(康王之誥)』에 이르기를 「[문왕의 덕이] 널리 상제(上帝)에게 들리니, 상제가 아름답게 여겨 하늘이 이에 문왕에게 크게 명하였다.」라고 하였다. 만약 명이 없다면 사관의 경전이 어찌하여 하늘이 이에 문왕에게 크게 명하였다고 말하였겠는가?
이른바 대명(大命)이란 하늘이 이에 문왕에게 명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성인이 움직이고 행하는 것이 하늘이 명하는 뜻이어서 하늘과 합치하니 마치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 같다는 것이다. 『서(書)』는 바야흐로 강숙(康叔)을 격려하고 권하여 힘써 선을 행하게 하려 하였으므로, 문왕이 도를 행하여 위로 하늘에 들리니 하늘이 이에 그에게 크게 명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시(詩)』에 이르기를 「이에 서쪽을 돌아보시니, 이곳이 내가 헤아린 곳이로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뜻이다. 하늘은 머리와 얼굴이 없는데 돌아본다는 것이 어찌 된 것인가? 사람에게는 돌아보고 흘겨보는 것이 있으니, 사람으로써 하늘을 본뜨면 일이 쉽게 보이므로 돌아본다고 한 것이다. 하늘이 이에 문왕에게 크게 명하였다는 것은 돌아본다는 뜻이니, 실은 하늘의 명이다. 무엇으로 이를 증명하는가? 무릇 대인은 천지와 그 덕을 합하고, 일월과 그 밝음을 합하며, 사시와 그 차례를 합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합하여, 하늘보다 앞서도 하늘이 어기지 않고, 하늘보다 뒤에 하여도 하늘의 때를 받든다. 만약 반드시 하늘의 명이 있어야 그에 따라 일을 한다면, 어찌 하늘보다 앞서고 하늘보다 뒤에 할 수 있겠는가? 천명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마음에서 발하므로 하늘보다 앞서고 뒤에 하는 부지런함이 있는 것이다. 하늘의 때에 합한다고 말하였으므로 [하늘이] 어기지 않고 하늘을 받든다는 글이 있는 것이다.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크도다, 요(堯)의 임금 됨이여! 오직 하늘이 크거늘 오직 요가 그것을 본받았다.」라고 하였다. 왕자가 하늘을 본받는 것은 [하늘이] 어기지 않고 하늘을 받든다는 뜻이다. 자연의 본성을 미루어 하늘과 합치한다. 이것이 이른바 문왕에게 크게 명하였다는 것이니, 문왕의 뜻에서 나와 문왕이 스스로 한 것이지, 하늘이 붉은 참새를 몰아 문왕에게 알리게 하여 마땅히 왕이 될 것이라 말하자 이에 감히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문왕의 붉은 참새와 무왕의 흰 물고기는 하늘이 창성함을 명하고 도운 것이 아니다. 길한 사람이 일을 일으키면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들이 부르지 않아도 이르고 상서로운 물건이 부르지 않아도 오며, 은연히 어울려 맞아서 마치 누가 시킨 것 같으니, 문을 나서면 길한[吉] 말을 듣고 돌아보면 좋은 것을 보는 것은 자연의 도이다. 문왕이 마땅히 흥할 때 붉은 참새가 마침 왔고, 물고기가 뛰고 까마귀가 날 때 무왕이 우연히 보았으니, 하늘이 참새를 이르게 하고 흰 물고기를 오게 한 것이 아니라, 길한 물건이 움직이고 날 때 성인이 마주친 것이다. 흰 물고기가 왕의 배에 들어온 것에 대하여 왕양(王陽)이 말하기를 「우연히 마침 그런 것이다.」라고 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 유곤(劉琨)이 전에 홍농태수(弘農太守)였을 때 범이 강을 건넜다. 광무황제가 말하기를 「우연히 마침 저절로 그런 것이지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왕양이 '마침'이라 말하고 광무가 '우연'이라 말한 것은 자연에 합한다고 할 수 있다.
정(情)과 성(性)은 사람을 다스리는 근본이며 예악(禮樂)이 말미암아 생겨난 바이다. 그러므로 정과 성의 끝을 따져서 예로 막고 악으로 절제한다. 성에는 낮추고 겸손하며 사양하는 것이 있으므로 예를 제정하여 그 마땅함에 맞게 하고, 정에는 좋아함·미워함·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있으므로 악을 지어 그 공경을 통하게 한다. 예가 제정되는 까닭과 악이 지어지는 까닭은 정과 성이다. 옛 유자와 옛 학자들이 편장(篇章)을 지으면서 논하여 말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실상을 확정한 이는 없었다. 주(周)나라 사람 세석(世碩)은 인성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고 여겨, 사람의 선한 성을 들어 길러서 이루면 선이 자라고, 악한 성을 길러서 이루면 악이 자란다고 하였다. 이와 같다면 성에는 각각 음양이 있고, 선악은 기르는 바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세자(世子)는 『양서(養書)』 한 편을 지었다. 복자천(宓子賤)·칠조개(漆雕開)·공손니자(公孫尼子)의 무리도 정과 성을 논하였는데, 세자와 서로 드나들어 모두 성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고 말하였다.
맹자(孟子)는 성선(性善)의 편을 지어, 인성은 모두 선하며 선하지 않게 되는 것은 사물이 어지럽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사람은 천지에서 태어나 모두 선한 성을 받았는데, 자라서 사물과 접하면서 방종하고 어그러져 불선이 날로 생긴다고 하였다. 맹자의 말대로라면 사람이 어릴 때에는 선하지 않은 이가 없다. [그러나] 미자(微子)는 「나는 예전에 [주가] 어린아이일 때 말하기를, 왕자(王子)가 [왕위에] 나서지 않기를 [바랐다].」라고 하였다. 주(紂)가 어린아이였을 때 미자가 그의 선하지 않은 성을 보았다. 성의 악함이 뭇 백성보다 뛰어나지 않았고, 자라서 어지럽힘이 변하지 않았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양설식아(羊舌食我)가 처음 태어났을 때 숙희(叔姬)가 그를 보러 당(堂)에 이르렀다가 그 울음소리를 듣고 돌아와 말하기를 「그 소리는 승냥이와 이리의 소리이다. 야심이 있어 친함이 없으니, 이 아이가 아니면 양설씨를 멸할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끝내 보려 하지 않았다. 자라서 기승(祁勝)이 난을 일으키자 식아가 거기에 가담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식아를 죽였다. 양설씨는 이로 말미암아 멸하였다. 주의 악은 어린아이 때에 있었고, 식아의 난은 처음 태어났을 때의 소리에서 드러났다.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나 아직 사물과 접하지 않았는데 누가 어그러지게 하였는가? 단주(丹朱)는 당(唐)의 궁궐에서 태어났고[生], 상균(商均)은 우(虞)의 집에서 태어났다. 당·우 시대에는 집집마다 봉할 만하였으니, 그들과 접한 이들은 반드시 선한 이가 많았을 것이다. 두 임금의 곁에는 반드시 현인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단주는 오만하고 상균은 포학하여 둘 다 제왕의 대통을 잃고 대대로 경계가 되었다. 또 맹자는 사람의 눈동자로 상을 보았으니, 마음이 맑으면 눈동자가 밝고 마음이 흐리면 눈동자가 [흐리다]고 하였다. 사람은 태어날 때 눈이 곧 밝은데, 밝음은 하늘에서 받는 것이어서 기운이 같지 않은 것이다. 어릴 때에는 밝다가 자라서 사람과 접하면서 비로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성은 본디 자연이어서 선악에 바탕이 있다. 맹자가 정과 성을 말한 것은 실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성선의 논의에도 말미암은 바가 있다.
혹은 어질고 혹은 의로운 것은 성의 기술[性術]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달리고 나는 것은 성의 식별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빛이 혹은 희고 혹은 검으며, 몸이 혹은 길고 혹은 짧은 것이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바꿀 수 없는 것은 천성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모두 물·흙·사물·그릇의 형체와 성질이 같지 않음은 알면서도, 선악을 받은 것이 다름은 알지 못한다. 한 살 된 갓난아이는 다투어 빼앗는 마음이 없으나, 자란 뒤에는 혹 이익과 색에 점점 [물들어], 미친 마음과 어그러진 행실이 이로 말미암아 생긴다. 고자(告子)는 맹자와 같은 때 사람인데, 그의 성론은 선악의 구분이 없다는 것으로, 이를 여울물에 비유하여 동쪽으로 터 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 주면 서쪽으로 흐르니, 무릇 물이 동서의 구분이 없는 것은 사람에게 선악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무릇 고자의 말은 사람의 성이 물과 같다는 것이다. 성이 물과 같다면 물로 성을 비유할 수 있으니, 금이 금이 되고 물이 물이 되는 것과 같다. 사람이 선하면 선에 말미암고, 악하면 또한 악에 말미암는다. 처음에 천연의 자질을 받고 순일한 바탕을 받으므로 태어나면서 조짐이 드러나 선악을 살필 수 있다. 선악의 구분이 없어 옮겨 갈 수 있는 자는 중인(中人)을 이르니,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아 가르침을 받아 이루어져야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중인 이상은 높은 것을 말해 줄 수 있고, 중인 이하는 높은 것을 말해 줄 수 없다.」라고 하였다. 고자가 물을 터 주는 것으로 비유한 것은 한갓 중인을 이른 것이지,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악한 자를 가리킨 것이 아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성은 서로 가깝고, 습(習)은 서로 멀다.」라고 하였다. 무릇 중인의 성은 익히는 바에 달려 있다. 선을 익히면 선하게 되고 악을 익히면 악하게 된다.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악한 데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익힘에 달려 있지 않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오직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옮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성에 선과 불선이 있어 성인의 교화와 현인의 가르침으로도 다시 옮겨 바꿀 수 없다. 공자는 도덕의 조종이며 제자(諸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이인데, 「상지와 하우는 옮기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고자의 말이 실상을 얻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릇 고자의 말에도 말미암은 바가 있다. 『시』에 이르기를 「저 아름다운 사람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하였는데, 그 전(傳)에 이르기를 「비유하자면 누인 실과 같아서 쪽으로 물들이면 푸르고, 주사로 물들이면 붉다.」라고 하였다. 무릇 물을 터서 동서로 흐르게 하는 것은 실을 물들여 푸르고 붉게 하는 것과 같다.
단주와 상균은 이미 당·우의 교화에 물들었는데도 단주가 오만하고 상균이 포학한 것은, 지극히 악한 바탕이어서 쪽과 주사의 변화를 받지 않은 것이다. 손경(孫卿)은 맹자에 반대하여 「성악(性惡)」 편을 지어, 인성은 악하며 그 선한 것은 인위[僞]라고 여겼다. 성이 악하다는 것은 사람은 태어나면서 모두 악한 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인위라는 것은 자란 뒤에 힘써 선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손경의 말대로라면 사람은 어릴 때 선함이 없다. [그러나] 후직(后稷)은 아이였을 때 나무 심기를 놀이로 삼았고, 공자는 걸을 수 있게 되자 제기[俎豆]를 가지고 놀았다. 돌은 나면서부터 단단하고 난초는 나면서부터 향기롭다. 선한 기운을 받아 자라서 이루어지므로, 나무 심기 놀이를 하던 이는 당(唐)의 사마가 되었고, 제기를 가지고 놀던 이는 주(周)의 성스러운 스승이 되었다. 난초와 돌의 성을 받았으므로 단단하고 향기로운 징험이 있는 것이다. 무릇 손경의 말은 실상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악의 말에도 말미암은 바가 있다. 한 쌍의 갓난아이는 미루어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 먹을 것을 보면 부르짖으며 먹고자 하고, 좋은 것을 보면 울며 가지고 놀고자 한다. 자란 뒤에는 정을 금하고 욕심을 끊어 힘써 선을 행한다. 유자정(劉子政)이 이를 비판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하늘에는 기운이 없는 것이다. 음양과 선악이 서로 대등하다면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은 어디에서 생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육가(陸賈)가 말하기를 "천지가 사람을 낳을 때 예의(禮義)의 성(性)으로써 한다. 사람이 자기가 명(命)을 받은 까닭을 살필 수 있으면 순(順)하고, 순한 것을 도(道)라 한다."라고 하였다. 육가는 사람이 예의를 성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았고, 사람이 또한 명을 받은 까닭을 살필 수 있다고 알았다. 성이 선한 자는 살피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선하고, 성이 악한 자는 비록 그것을 살필 수 있더라도 여전히 예를 등지고 의를 배반하니, 의로써 선으로 이끌어도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탐욕스러운 자도 청렴을 말할 수 있고, 어지러운 자도 다스림을 말할 수 있다. 도척(盜蹠)은 남의 도둑질을 비난하고 장교(庄蹻)는 남의 방종을 꾸짖으니, 밝음은 자기를 살필 수 있고 입은 현명함을 논할 수 있으나 성이 악하여 행하지 않으니 선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육가의 말은 실상을 얻지 못하였다.
동중서(董仲舒)가 손경(孫卿)·맹자(孟子)의 책을 보고 정성(情性)의 설을 지어 말하기를 "하늘의 큰 법(大經)은 한 번 음(陰)하고 한 번 양(陽)하는 것이다. 사람의 큰 법은 한 번 정(情)이고 한 번 성(性)이다. 성은 양에서 생기고 정은 음에서 생긴다. 음기는 비루하고 양기는 어질다. 성이 선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양을 본 것이다. 악하다고 말하는 자는 그 음을 본 것이다."라고 하였다. 중서의 말대로라면 맹자는 그 양을 보았고 손경은 그 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두 학파가 각기 본 바가 있다고 판정한 것은 옳다. 사람의 정성을 판정하지 않았으니, 정성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으므로 미진하다. 무릇 사람의 정과 성은 함께 음양에서 생기는데, 음양에서 생기는 것에는 두터움과 엷음이 있다. 옥은 돌에서 생기지만 순수한 것도 있고 섞인 것도 있으니, 성정이 음양에서 [생기는데] 어찌 순전히 선할 수 있겠는가? 중서의 말은 실상을 얻지 못하였다.
유자정(劉子政)이 말하기를 "성은 태어나면서 그러한 것으로, 몸에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는다. 정은 사물과 접하여 그러한 것으로, 밖으로 형체를 드러낸다. 밖으로 드러나면 양이라 하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음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자정의 말은 성이 몸에 있으면서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정은 사물과 접하여 형체가 밖으로 나오므로 양이라 하고, 성은 드러나지 않고 사물과 접하지 않으므로 음이라 한 것이다. 자정의 말대로라면 곧 정을 양으로, 성을 음으로 여기는 것이니, 본래 생겨난 근원에 의거하지 않고 구차하게 형체가 드러남과 드러나지 않음으로 음양을 정한 것이다. 반드시 형체가 드러나는 것을 양이라 한다면 성 또한 사물과 접하니, 다급할 때에도 반드시 여기에 있고, 넘어질 때에도 반드시 여기에 있다. 측은(惻隱)은 차마 하지 못함이고, 차마 하지 못함은 인(仁)의 기운이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며 사양하는 것은 성이 드러난 것이다. 접하여 만나는 것이 있으므로 측은과 낮추고 겸손함이 밖으로 형체를 드러낸다. 성이 안에 있어 사물과 접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아마 그 실상이 아닐 것이다. 성의 선악을 논하지 않고 한갓 안팎과 음양만 논하니, 이치를 알기 어렵다. 또 자정의 말을 따라 성을 음으로, 정을 양으로 삼는다면, 사람이 품부받은 정에는 끝내 선악이 있는가 없는가?
맹자로부터 아래로 유자정에 이르기까지 큰 학자와 박식한 선비들은 듣고 본 것이 많았다. 그러나 정성을 논한 것은 끝내 정해진 옳음이 없다. 오직 세석(世碩)(儒)·공손니자(公孫尼子)의 무리만이 자못 그 바름을 얻었다. 이로써 말하면, 일은 알기 쉬우나 도는 논하기 어렵다. 풍부한 문장과 무성한 기록은 번성하기가 꽃과 같고, 익살과 거침없는 담론은 달기가 엿과 꿀 같으나, 반드시 실상을 얻은 것은 아니다. 실상은, 사람의 성에 선도 있고 악도 있는 것이 사람의 재주에 높음도 있고 낮음도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높은 것은 낮게 할 수 없고, 낮은 것은 높게 할 수 없다. 성에 선악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재주에 높고 낮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성을 품부받는 것과 명을 받는 것은 똑같은 하나의 실상이다. 명에는 귀천이 있고 성에는 선악이 있다. 성에 선악이 없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명에 귀천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구주(九州) 전토(田土)의 성질은 좋고 나쁨이 고르지 않다. 그러므로 황색·적색·흑색의 구별과 상·중·하의 차등이 있다. 물과 큰물이 같지 않으므로 맑고 흐린 흐름과 동서남북으로 향하는 방향이 있다. 사람은 천지의 성을 품부받고 오상(五常)의 기를 품어, 어떤 이는 인(仁)하고 어떤 이는 의(義)하니 성술(性術)이 어긋나기 때문이다. 움직이고 행동하며 나아가고 날아오름에 어떤 이는 무겁고 어떤 이는 가벼우니 성식(性識)이 다르기 때문이다. 얼굴빛이 어떤 이는 희고 어떤 이는 검으며, 몸의 형체가 어떤 이는 길고 어떤 이는 짧아,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바꿀 수 없으니 천성이 그러한 것이다. 나는 본래 맹가(孟軻)가 사람의 성이 선하다고 말한 것은 중인(中人) 이상이고, 손경이 사람의 성이 악하다고 말한 것은 중인 이하이며, 양웅(揚雄)이 사람의 성이 선악이 섞였다고 말한 것은 중인이라고 여긴다. 경(經)에 반하되 도에 합하는 것이라면 가르침으로 삼을 수 있으나, 성의 이치를 다한 것으로는 아직 아니다.
유자(儒者)들이 논하기를 "천지가 일부러 사람을 낳았다."라고 한다. 이 말은 망령되다. 천지가 기를 합하면 사람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다. 부부가 기를 합하면 자식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과 같다. 부부가 기를 합하는 것은 그때에 자식을 낳고자 해서가 아니다. 정욕이 움직여 합하고, 합하여 자식을 낳는 것이다. 부부가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으니, 이로써 하늘이 일부러 사람을 낳지 않음을 안다. 그렇다면 사람이 천지에서 생겨나는 것은 물고기가 연못에서, 이가 사람에게서 [생겨나는 것과] 같다. 기로 인하여 생기고 종류끼리 서로 낳으니, 만물이 천지 사이에 생겨나는 것은 모두 하나의 실상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천지는 일부러 사람을 낳지 않고, 사람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다면, 일을 논하는 자들은 무슨 까닭으로 천지는 화로이고, 만물은 구리이며, 음양은 불이고, 조화(造化)는 장인이라고 말하는가? 살피건대 도공과 야공(冶工)이 구리를 녹이고 그릇을 굽는 것은 일부러 하는 것이다. 그런데 천지가 일부러 사람을 낳지 않고 사람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날 뿐이라고 한다면, 도공과 야공이 일부러 그릇을 만들지 않았는데 그릇이 우연히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비유가 일에 맞지 않으면 비유라고 할 수 없고, 글이 실상에 걸맞지 않으면 옳다고 할 수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는 사람이 기를 품부받음이 순일할 수 없음이, 녹인 구리가 거푸집에 내려가 형체를 이루고 구운 그릇이 불을 얻는 것과 같음을 비유한 것이지, 천지가 사람을 낳는 것이 도공·야공과 같다는 말이 아니다."라고 한다. 비유를 일으킬 때 사람들은 모두 사람의 일을 끌어오는데, 사람의 일에는 체계가 있어 끊어 낼 수 없다. 눈으로 머리를 보려 하면 머리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고, 손으로 발을 도우려 하면 발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눈과 머리는 같은 형체이고, 손과 발은 같은 몸이다. 이제 도공과 야공이 처음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 때는 반드시 틀로 형체를 만드니 일부러 만드는 것이고, 숯을 태워 불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화로와 아궁이를 조절하니 일부러 하는 것이다. 녹인 구리가 다 이루어지지 못하고 구운 그릇이 다 좋게 되지 못하는 데 이르러서는, 일부러 낳을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이 일부러 사람을 낳을 수 없다면, 그 만물을 낳는 것도 일부러 할 수 없다. 천지가 기를 합하면 사물이 우연히 저절로 생겨난다. 밭 갈고 김매며 씨 뿌리는 것은 일부러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여물거나 여물지 않는 데 이르러서는 우연히 저절로 그러한 것이다. 무엇으로 이를 증험하는가? 만약 하늘이 일부러 만물을 낳았다면 마땅히 서로 친애하게 해야지, 서로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오행(五行)의 기로 하늘이 만물을 낳았다. 만물이 오행의 기를 머금었으므로, 오행의 기가 번갈아 서로 해친다."라고 한다.
[답하여] 말한다. "하늘은 마땅히 한 행(行)의 기로 만물을 낳아 서로 친애하게 해야지, 오행의 기로 도리어 서로 해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서로] 쓰임이 되게 하고자 하므로 서로 해치게 한 것이니, 해침으로써 서로 이루어 준다. 그러므로 하늘은 오행의 기를 써서 만물을 낳고, 사람은 만물을 써서 만사를 짓는다. 서로 제어하지 못하고, 서로 부리지 못하며, 서로 해치지 않으면 쓰임을 이루지 못한다. 금(金)이 목(木)을 해치지 않으면 목은 쓰임을 이루지 못한다. 화(火)가 금을 녹이지 않으면 금은 그릇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러 사물이 서로 해치고 서로 이롭게 하며, 피를 머금은 동물이 서로 이겨 굴복시키고, 서로 물어뜯고, 서로 잡아먹는 것은 모두 오행의 기가 그렇게 시키는 것이다."라고 한다. [답하여] 말한다. "하늘이 만물을 낳아 서로 쓰임이 되게 하고자 하여 서로 해치지 않을 수 없다면, 호랑이·이리·살무사·뱀과 벌·전갈 같은 동물을 낳은 것은 모두 사람을 해치는데, 하늘이 또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의 쓰임이 되게 하고자 한 것인가? 또 한 사람의 몸은 오행의 기를 머금었으므로 한 사람의 행실에는 오상의 지조가 있다. 오상은 오행의 도이다. 오장(五藏)이 안에 있어 오행의 기가 갖추어져 있다. 논자의 말대로라면 피를 머금은 동물은 오행의 기를 품어 곧 서로 해친다. [그렇다면] 한 사람의 몸은 가슴에 오장을 품었으니 스스로 서로 해칠 것이고, 한 사람의 지조인 의를 행하는 마음도 스스로 서로 해칠 것이다. 또 오행의 기가 서로 해치고 피를 머금은 동물이 서로 이겨 굴복시킨다는 것은 그 증험이 어디에 있는가?"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인(寅)은 목이고 그 짐승은 호랑이이다. 술(戌)은 토(土)이고 그 짐승은 개이다. 축(丑)·미(未)도 토이니, 축의 짐승은 소이고 미의 짐승은 양이다. 목이 토를 이기므로 개와 소·양은 호랑이에게 굴복당한다. 해(亥)는 수(水)이고 그 짐승은 돼지이다. 사(巳)는 화이고 그 짐승은 뱀이다. 자(子)도 수이고 그 짐승은 쥐이다. 오(午)도 화이고 그 짐승은 말이다. 수가 화를 이기므로 돼지가 뱀을 먹는다. 화는 수에게 해를 입으므로 말이 쥐똥을 먹으면 배가 부어오른다."라고 한다. [답하여] 말한다. "참으로 논자의 말과 같다면, 피를 머금은 동물에도 서로 이기지 못하는 증험이 있다. 오는 말이고, 자는 쥐이며, 유(酉)는 닭이고, 묘(卯)는 토끼이다. 수가 화를 이긴다면 쥐는 어찌 말을 쫓지 않는가? 금이 목을 이긴다면 닭은 어찌 토끼를 쪼지 않는가? 해는 돼지이고 축은 소이다. 토가 수를 이긴다면 소·양은 어찌 돼지를 죽이지 않는가? 사는 뱀이고 신(申)은 원숭이이다. 화가 금을 이긴다면 뱀은 어찌 원숭이를 먹지 않는가? 원숭이는 쥐를 두려워한다. 원숭이를 물어뜯는 것은 개이다. 쥐는 수이고 원숭이는 금이다. 수는 금을 이기지 못하는데 원숭이는 무슨 까닭으로 쥐를 두려워하는가? 술은 토이고 신은 원숭이이다. 토는 금을 이기지 못하는데 원숭이는 무슨 까닭으로 개를 두려워하는가? 동방은 목이고 그 별은 창룡(倉龍)이다. 서방은 금이고 그 별은 백호(白虎)이다. 남방은 화이고 그 별은 주조(朱鳥)이다.
북방은 수이고 그 별은 현무(玄武)이다. 하늘에 네 별의 정기가 있어 내려와 네 짐승의 몸을 낳는다. 피를 머금은 동물은 네 짐승을 우두머리로 삼으니, 네 짐승이 오행의 기를 머금은 것이 가장 뚜렷하다. 살피건대 용과 호랑이는 사귀어도 서로 해치지 않고, 새와 거북은 만나도 서로 해치지 않는다. 네 짐승으로 증험하고 십이진(十二辰)의 짐승으로 검증해 보면, 오행의 동물이 기와 성질로 서로 극(剋)한다는 것은 더욱 맞지 않는다. 무릇 만물이 서로 극하여 해치고, 피를 머금은 동물이 서로 굴복시키며, 서로 잡아먹는 데까지 이르는 것은, 저마다 이빨의 날카로움과 무딤, 근력의 우열, 동작의 교묘함과 민첩함, 기세의 용맹함에 따른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서 세력이 서로 대등하지 않고 힘이 균등하지 않아 스스로 서로 이겨 굴복시키는 것과 같다. 힘으로 서로 굴복시키면 칼날로 서로 해치게 된다. 사람이 칼날로 서로 해치는 것은 동물이 이빨·뿔·발톱·어금니로 서로 들이받고 찌르는 것과 같다. 힘이 강하고 뿔이 날카로우며 기세가 맹렬하고 어금니가 길면 이길 수 있고, 기운이 미약하고 발톱이 짧아 보잘것없으며(誅)[銖] 담이 작고 며느리발톱이 무디면 굴복하고 두려워한다.
사람에게는 용맹과 겁약이 있으므로 싸움에 승부가 있으니, 이긴 자가 반드시 금의 기를 받은 것도 아니고, 진 자가 반드시 목의 정기를 얻은 것도 아니다. 공자(孔子)가 양호(陽虎)를 두려워하여 뒷걸음질 치며 땀을 흘렸으나, 양호가 반드시 얼굴빛이 흰 것도 아니고 공자가 반드시 얼굴이 푸른 것도 아니다. 매가 비둘기·참새를 치고, [새매가] 고니·기러기를 쪼는 것은, 반드시 매·[새매가] 남방에서 나고 비둘기·참새·고니·기러기가 서방에서 났기 때문이 아니라, 본래 근력의 용맹과 겁약으로 서로 이겨 굴복시키는 것이다." 한 대청 위에는 반드시 논쟁하는 자가 있다. 한 고을 안에는 반드시 송사하는 자가 있다. 송사에는 반드시 굽음과 곧음이 있고, 논쟁에는 반드시 옳음과 그름이 있다. 그르고 굽은 자는 지고, 옳고 곧은 자는 이긴다. 또한 혹은 말재주가 좋고 혀가 날카로워 말과 비유가 종횡으로 나오는 자가 이기고, 혹은 말이 막히고 약하며 더듬어 조리가 닿지 않는 자가 진다.
혀로 논쟁하고 송사하는 것은 칼과 창으로 싸우는 것과 같다. 날카로운 칼과 긴 창에 손발이 굳세고 빠른 자는 이기고, 무딘 칼과 짧은 창에 손발이 느리고 굼뜬 자는 진다. 사물이 서로 이기는 것은 혹은 근력으로, 혹은 기세로, 혹은 교묘함과 민첩함으로 한다. 작아도 기세가 있고 입과 발이 민첩하면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제어할 수 있고, 커도 뼈의 힘이 없고 뿔과 날개가 굳세지 않으면 큰 것으로서 작은 것에 굴복한다. 까치가 고슴도치 가죽을 먹고 때까치가 뱀을 먹는 것은 고슴도치와 뱀이 민첩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기와 등에의 힘은 소나 말만 못하나 소와 말이 모기와 등에에게 시달리는 것은 모기와 등에에게 기세가 있기 때문이다. 사슴의 뿔은 개를 들이받기에 충분하고, 원숭이의 손은 쥐를 치기에 충분하지만, 사슴이 개에게 제압당하고 원숭이가 쥐에게 굴복하는 것은 뿔과 발톱이 날카롭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 살 된 소가 목동에게 몰리고, 키가 한 길이나 되는 코끼리가 월(越)나라 아이에게 갈고리로 끌리는 것은 민첩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민첩함을 얻으면 작은 것으로도 큰 것을 이길 수 있고, 그 민첩함이 없으면 강한 것으로서도 약한 것에게 굴복한다.